あらすじ

"운동장을 울타리처럼 둘러싼 나무들을 그윽한 눈으로 하나하나 올려다보던 그녀가 얼마 동안 잠잠히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몸이 얼고, 다 얼어터진 후에야 비로소 바람을, 나무가 가지를 휘어 안고, 등을 쓸어내린다.” 진우는 서은을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진우의 시선과 부딪치자 서은이 부끄러운 듯 가만히 미소 지었다. 마치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 볼이 빨개진 여자아이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야, 그건. 추억을 이끌어내는 암호?” 서은이 고개를 저었다. “시예요.” “시?” “네. 이성목의 시.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흠. 시를 암송하신다? 제법 국문학도 티가 나는 걸?” “제목을 물어봐 주세요.” 서은이 스무고개라도 하듯 요청했다. “좋아. 제목이 뭐지?” “나무가 바람을 만나는 시간.” 나무가……바람을 만나는 시간. 진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목만으로도 미묘한 울림이 있었다. “계속해요?” 서은이 물었다. “계속해 봐.” 진우가 대답했다. “아픈 데 없느냐. 내가 널 잊었겠느냐.” 그리고 서은은 잠깐 주춤했다. 눈 속에 아득하게 안개가 서린 것 같았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하늘하늘 새어 나왔다. “바람이, 제 품에서 우는 것을, 늙은 나무는, 뼈를 뚝뚝 꺾어내며, 보여주려 하지만, 나무는 모른다. 바람은 제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울음이 없다는 것을. 끝내는, 나무의 뼈마디 으스러지는 소리만, 마을까지 내려와, 아궁이 군불 삭정이 같은 것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곤 하는 것이다.” 아늑한 침묵이 진우와 서은 주변을 감돌았다. 시에서 번지는 기운이 마음을 스윽 베는 것도 같고, 그 베인 상처를 따뜻이 어루만져주는 것도 같았다. 진우는 서은이 품어 안은 침묵을 차마 깨뜨리지 못하고 기다렸다. “나는요. 2연이 제일 아파요.” “…….” “아픈 데 없느냐. 내가 널 잊었겠느냐……. 이 부분.” 막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서은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우는 가슴 가운데 일기 시작한 물결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다시 조금 더 기다린 연후에 서은을 돌아보니, 맑은 눈동자에 이슬과 웃음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 눈으로 서은은 뿌스스 웃어 보였다. “집에 가요, 아저씨. 배고프다.” 진우도 웃었다. 소리 없이, 마음을 허물어뜨리며, 그녀에게.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오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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