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별 볼 일 없는 정해담 씨의 유일한 장점이 뭔 줄 압니까.”
나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희뿌연 담배연기.
두 가지 모두가 해담을 숨 막히게 했다.
“분수 파악을 잘 한다는 거.”
한숨처럼 느리고 짙은 음성이었다.
그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말투에, 해담은 하마터면 그가 듣기 좋은 칭찬을 한다고 오해를 할 뻔했다.
“눈치껏 행동하고 알아서 찌그러지는 게 제일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알아서 찌그러진다는 냉소적인 한 마디가 아슬아슬하게 엉겨있던 그녀의 자존감을 기어코 무너뜨리고 만다.
“그런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였나. 아니면 정해담 씨가 감쪽같이 나를 속인 건가.”
해담과 한선의 두 번째 만남. 재회에는 오직 오해와 상처뿐이었다.
충족의 종점에 몇 번이나 도달한, 그야말로 짐승들의 밤이나 다름없었던 첫 번째 만남과는 전혀 다르게.
* * *
“당신이 거짓말 할 때마다 무서워.”
한숨처럼 낮고 깊은 목소리로 해담의 귓가에 속삭인 한선은 그녀의 흐트러진 긴 머리칼 안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때처럼 거짓말만 남기고 내 곁에서 또 사라져 버릴까 봐.”
나를 처음 유혹했던 그때처럼,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를 정해담 당신의 몸에 완전히 길들여지게 만들었던 그 밤처럼, 이렇게나 순진하고 예쁜 눈으로, 영악하게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망을 삼켜내기라도 하는 듯 한선의 목소리가 낮게 침잠했다.
“한선 씨의 이런 눈빛과 목소리, 손끝, 숨결. 그런 게 내게는 상처가 돼요.”
해담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나를 향한 당신의 모든 것들이 전부…….”
그 커다랗고 까만 눈망울은 한선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다가, 이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