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현아에게 비겁한 타락의 흔적인 태수.
태수에게 손에 닿지 않는 달콤한 향인 현아.
욕심낼 수 없는 감정은 끈적이는 집착으로 몸집을 키우는데......
설렁설렁 바람 같은 남자, 태수.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세상만사 제멋대로 살아가던 그에게 경계심 많은 고양이가 나타났다.
이제 곧 내려오겠지. 어쩔까. 다시 올라갈까. 길을 막아설까. 생각이 갈피를 못 잡고 휘몰아쳤다.
주제넘은 참견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 어떤 이유도, 핑계도 소용없었다. 그의 위치가 그랬다.
그럼에도, 그렇다 해도 말이다.
태수는 그 여자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랐다.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친구를 눈에 담지 않기를,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마음이 그랬다.
이 순간을 넘긴다 해서 이미 비틀어진 관계가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오늘 그녀는 충분히 비참하고 힘들었을 테니까.
하, 메마른 숨을 내뱉은 태수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지저분한 변명을 자꾸만 갖다 붙이는 자신이 한심해진 탓이었다.
그래. 그래 인정한다. 황현아, 그 여자가 신경 쓰였다. 친구의 여자가 뭉툭한 가시가 되어 눈에 걸렸다.
미친 새끼처럼.
* ‘하얀 꽃 푸른 비에 젖다’ 출간예정작과 연작입니다.
# 비참할 땐 꼭 그가 있다 # 경계심 많은 앙큼한 고양이 # 재수 없는 이 남자 확 먹어버릴까?
#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여자 # 그의 본성을 자극하다.
[미리보기]
“김태수…….”
현아의 입술 사이로 나긋하게 흘러나온 ‘김태수’란 이름이 꼭 녹아 흐르는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끈적거렸다.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른한 열감에 사로잡히는 그를 아는 것처럼.
“당신이 날 보는 눈빛,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날 원하죠? 당신은 나한테 항상 발정하잖아.”
그래, 그는 저 빌어먹을 여자한테 언제나 뜨겁게 열 올랐다. 처음부터 그랬다. 우혁이 저 여자의 어깨를 소유욕 가득한 손으로 붙잡고 나타났을 때부터.
태수는 그 참담한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도, 필사적으로 숨기지도 않았다.
“원래 대 놓고 먹는 것보다 몰래 훔쳐먹는 게 더 감칠맛 나는 법이잖아요. 오늘 밤, 가장 화려한 곳에 방을 잡고 내게 연락해요.”
점점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우혁과 이화를 힐끗 돌아본 현아는 붉은 립스틱을 꺼내 냅킨 위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11개의 숫자가 적힌 냅킨이 태수 앞으로 나풀거리며 날아왔다.
“날 너무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요. 너무 늦으면 다른 곳에서 나를 위로해줄 남자를 찾을 테니까.”
현아가 등을 돌려 떠나갔다.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냅킨을 사납게 낚아챈 태수도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문을 열고 밖으로 한 발을 내딛는데 누군가 신랑 신부를 짓궂게 놀리는 소리와 함께 으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요란한 소리는 문이 닫히는 순간 메마른 황무지에 일어난 마른 먼지처럼 뿌옇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