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막바지, 결혼 동맹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엘로디 클로버.
도망치기 위해 전방의 종군 간호사로 지원했다.
포탄이 날아오는 곳에서 매일같이 피를 뒤집어 쓰고, 시체를 닦으면서도 오로지 돈 생각뿐이었다. 대륙으로 가는 배삯은 생각보다 값비쌌다.
죽음 앞에 존엄을 지워버린 삶.
그런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해군 장교, 레나트 폰 슐로우츠.
맹수같은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온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엘로디를 능욕했다.
"우리가 새벽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비켜요, 제발….”
“이보다는 조금 더 아름다웠을 텐데.”
미치광이의 눈을 하고 멀쩡한 사람처럼 말을 하는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마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엘로디를 잡아 돌렸다.
“그냥 놀자고. 순진한 척 그만두고.”
레나트가 뽀족해진 가슴 끝에 노골적인 욕망을 문질렀다. 무구해서 더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랬던 그인데.
“기어이 내가 굶어 죽는 꼴이 보고 싶다면 도망쳐도 좋아. 대신 각오해. 잡히면 그땐 지금보다 더 지옥일 테니까.”
엘로디를 더럽히고 짓밟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가 사랑을 깨닫고 처절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난 너 가질 거거든. 시체도 예쁠 거야, 분명히.”
잔혹함을 가장한 두 눈에는 어린아이를 닮은 공포가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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