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세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때부터 악인이 존재했을까.
성경이나 신화에서처럼 절대자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고 창조자의 뜻대로 살지 못한 벌로 수치심과 죄책감을 알게 됐다면…… 악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맞지 않을까.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면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고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원죄에 대한 고뇌는 쓸데없는 생각에 불과하다.
나는 악녀다.
그가 날 가리키며 손가락질 할 때 외쳤던 그 단어는 이미 가슴에 주홍글씨가 되어 낙인처럼 찍혀 버렸다. 서슬 퍼런 칼날 위에 발을 올려놓고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위로 뛰어들었다. 악녀라는 그의 말을 핑계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일도 서슴없이 했다.
‘내 사랑에 기대어…… 이제 널 편히 쉬게 해!’
그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얼마나 후회를 거듭했는지 모른다. 왜 자신은 그가 주는 사랑에 안주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놓은 분노에 잠식되었을까. 넘치도록 부어주는 그의 사랑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잔악한 어미의 피 내림 때문이 아닐까 가끔 생각하곤 했다.
삭지 않은 열망 때문에 한 가정을 파멸시키고자 했으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또 한 명의 악녀! 그녀가 잠들어 있는 납골당에 가서 소리쳐 따지고 싶다.
이게 당신이 원한 일이야! 라고.
이미 오래전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는 이는 많았다. 사랑이란 미친 감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남자도, 가정을 지키겠다고 악귀처럼 소리 지르던 그 남자의 여자까지 모두가 태연히 잘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만 사라지고 없다. 초라한 여자 하나 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뒤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잘 돌아간다. 그래서 시계바늘을 붙잡고 뒤로 돌려 과거로 회귀하고 싶다는 욕망 따위는 품지 않는다. 다시 그 지옥속의 잔인한 시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준비됐어?”
또 다른 남자, 그녀의 희생물 홍지성.
소진은 어깨에 닿는 손길이 소름끼치게 느껴졌지만 속마음을 숨긴 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그려냈다.
“아름다워.”
홀린 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고개를 숙여 제 머리에 키스하는 남자! 과연 오늘을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추악하고, 더러워.
아마도 그런 말을 하며 잘못된 선택을 한 제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그녀를 제물 삼아 현실을 회피할 것이다. 선과 악이 동전의 양면이듯 아름다움과 추악함도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그녀의 추악한 면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녀는 그에게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해, 너만을.”
소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고백이 될 수 있을 말일 텐데 그녀에게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하는 먼지처럼 허망한 말일 뿐이었다.
“너도 그렇지?”
확인을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꼭 저에게 듣고 말겠다는 듯 집요하게 타오르는 눈빛을 그대로 돌려줄 수는 없다. 아무리 뻔뻔하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을 가슴에 넣어두고 입으로 거짓 고백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소진은 가만히 그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다 감질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으로 얘기해 줘.”
“소중한 말일수록 아껴두고 싶어요. 나중에, 우리가 정말 부부가 되는 날 그때 고백할게요. 내 마음을 아낌없이 보여줄게요.”
연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충분히 할 수 있고 감쪽같이 남을 속이는 일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줍은 미소는 더 짙어지고 유혹의 향기를 내뿜으며 그를 칭칭 감았다.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마지막 화려한 폭발을 위해 차곡차곡 폭약을 눌러 담듯 제 욕망을 채웠다. 하와를 유혹하던 뱀처럼 나른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가지.”
“떨려요.”
소진의 말에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 남자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개차반, 인간망종, 그리고 문제아라는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던 남자였다. 그럴 듯한 집안의 장남인데도 혼담을 넣는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니 일이 잘못된다 해도 세상의 비난은 오롯이 그녀를 향할 수는 없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추진한 일이 이제야 끝을 보인다.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사람의 부드러운 손끝에 올린 제 손이 무색할 따름이다. 발목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제 손을 잡고 있던 그가 손을 풀고 어깨에 둘렀다. 몸이 밀착되자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약혼식이 아니라 결혼식이라면 좋겠어.”
‘아니, 절대로! 당신과 결혼이라는 과정까지 갈 생각은 추호에도 없어.’
소진은 식이 시작될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치미는 말들을 참아냈다. 조금만, 아직은 끝이 아니기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문이 열리고 많은 빛들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현란한 조명과 하얀 테이블보, 처연한 약혼식을 알리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얼음조각까지. 마법에 걸린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처럼 그녀도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춤을 출 수밖에 없다.
“저 자식은 언제 봐도 기분 나빠.”
식장에 입장하는 순간 그가 한 곳을 노려보다 나직하게 뇌까렸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다.
그가 날 보고 있다.
미약하게 뛰고 있던 가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심장이 시커멓게 죽어버리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남자의 팔을 끼고 걸어가야 하는 처지가 순간 서러웠다. 안압이 높아지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안 가?”
“……가요.”
목이 잠겼다. 약해지는 마음의 한 자락이 그녀의 걸음을 멈칫하게 했지만 바로 잘라버린다. 가야할 길만 생각해야 한다.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약혼케이크가 놓인 테이블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찌를 듯이 느껴지는 시선에 마음을 꽁꽁 걸어 잠갔다.
“이제 곧 약혼식이 거행될 예정이오니, 하객 여러분들은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지성의 친구라고 했던가.
사회를 맡은 지성의 친구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굳어졌던 표정을 풀었다. 행복해 죽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지성의 팔을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짧지만 가장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헤치고 자리에 앉는 순간, 건휘가 똑바로 눈을 맞춰왔다.
배건휘.
그녀의 사랑, 마지막 남은 양심. 하지만 이제는 버려야 할 심장…….
‘정말 하는 건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좨쳐 묻는 건휘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했다.
‘해요, 당신이 말했듯이 난 악녀니까…… 잘 해낼 거예요.’
도전적인 대답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늘 든든하던 어깨가 축 늘어졌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던 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마주친 눈빛.
‘네 뜻대로…….’
그가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간다. 현악 4중주의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그녀의 하나뿐이었던 사랑이 약혼식이 열리는 공간을 나가고 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그녀의 눈동자에 미약하게 남았던 생기가 꺼져버렸다. 이젠 그녀에게 어울리는 어둠만이 남았다. 희미하게 삶을 밝혀주던 단 하나의 불빛마저 사라졌으니까. 파멸의 춤은 새빨간 불꽃을 피우며 막바지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