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달빛 한 점 없는 까만, 그런 밤이 있다.
별빛마저 숨어버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그런 밤.
지독한 상처를 안고 성장한 인영은 깊은 그믐 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쫒기다 첫사랑 강우의 품속으로 뛰어든다.
“괜찮다면…, 지금 절 안아주세요.”
그와 함께 보내는 이 밤이 완벽하려면 사랑 따윈 끼어들어선 안된다.
인영은 자신의 처녀성이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는 것만큼이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두려웠다.
이 밤에 의미를 두면 둘수록 그녀의 미래도 사랑도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기억해. 이 밤이 우리의 첫 밤이지만 마지막 밤은 아니라는 걸.
#궁금했어. 어째서 너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는지
#좋아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알아?
#내가 대체 어디까지 널 봐줘야 하나?
[미리보기]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그냥 모두 다 잊고 싶어요. 그러니까….”
깊은 심호흡을 한 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아주세요.”
잊고 싶다라, 강우는 잔에 남아 있던 독한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안아 달라는 이유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목소리에서 의외로 꽤 결연한 의지를 발견한 강우의 마음이 많이 복잡해져 버렸다.
누구라도 붙잡고 똑같은 말을 던질 것만 같은 그녀를 향한 불안감 때문인가.
강우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아야만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남자는 느린 동작으로 술잔을 내려놓은 뒤 벽 쪽으로 걸어가 정원을 밝혔던 조명을 껐다.
바깥세상을 희미하게 비추던 불빛이 꺼지자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 이외의 모든 공간이 사라지듯 암흑 속으로 묻혀 버렸다. 마치 지구라는 행성 위에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호기롭게 안아 달라고 할 땐 언제고 강우가 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서자 여자는 순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흠칫 숨을 들이키며 소파 안쪽으로 물러서는 그녀를 향해 강우가 픽, 웃어 보였다.
“무서운가?”
“무…,무섭지 않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여자의 거짓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검은 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늘 그랬듯 치명적일만큼 고혹적이었다.
살짝 젖어있는 속눈썹과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가쁜 숨을 내쉬는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이 그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안달 날 정도로 가지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어리고 여린 꽃이 괴팍한 비바람에 꺾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켜 봐 왔던 시간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다림은 길고 지루하면서도 지독하게 흥미로워 결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리고 여린 꽃이 그의 앞에서 만개하려 하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꽃을 감상했다. 반듯하고 단아한 이마에서부터 곧게 뻗어 내려오는 날렵한 콧날,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비밀들을 간직한 별처럼 까맣게 빛나는 두 눈, 자그맣게 벌어져 떨리는 숨결을 내뱉고 있는 붉은 입술까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에 남자의 욕정이 순식간에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 오늘은 아니라고 말하던 양심의 소리는 깨끗이 무시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탐욕이었다.
그의 안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듯 했다.
‘가져,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 정인영은 오롯이 너만의 것이 될 테니까.’
사람, 그 중에서도 사내란 동물이 눈앞의 욕구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절감했다.
정해진 결말처럼 강우는 자신 안의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먼저 온 거야.”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책임을 돌리며 낮고 허스키하게 속삭인 강우는 몸을 숙여 그녀를 순식간에 당겨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