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준의 검이 녹지의 턱 아래와 거리를 바짝 좁혔다. 다른 손으로는 거칠게 녹지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분명 당황했을 터인데 그녀의 표정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죽이세요! 약조를 받지 못하느니, 전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이런, 이런! 발칙하고 무엄한!”
녹지의 목덜미에 검 날이 닿았다. 그 예리함에 살갗이 갈라지고 선혈이 배어나왔다. 녹지는 내심 두려웠다. 아무리 모진 마음으로 각오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눈 한번 깜박하지 못할 순간에 목이 베일 수도 있는 터였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자. 죽을 목숨이든, 살아 원하는 것을 이루든!
녹지는 고요한 눈빛으로 준을 우러러 보았다. 임금인 것이다 그것도 젊고 아주 잘생긴. 이 사내를 치마폭에 휘감으면 조선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찬바람 부는 나루터에서 서럽게 태어난 광대의 딸, 억울하고 비절한 죽임을 당한 아비와 어미의 포한을 사무치게 품은 천한 계집이 조선의 지존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녹지의 길고 가녀린 뽀얀 목덜미에서 붉은 꽃인 양 피어난 핏물이 준의 눈에 확 들어왔다. 굳게 다문 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준을 올려보며 녹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연하면서도 요염하고,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목이 베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웃음을 짓는 계집. 그녀의 미소에 갑자기, 믿을 수 없게 준의 피가 한 곳으로 뜨겁게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