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1307년 12월, 프랑스축축하고 서늘한 지하 밀실의 돌 벽에서 스며 나오는 냉기가 모직, 리넨, 가죽을 뚫고 곧장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 개의 횃불이 겨우 주위를 밝혀 줄 뿐, 실내를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두 남자는 추위쯤은 별것 아니라는 듯, 차가운 공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 중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다른 남자 앞에 앉아 있었다. 복종의 자세였지만, 당당하게 치켜든 머리와 넓은 가슴팍이 지금의 상황과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활력이 넘치는 이 남자와 비교하면, 서 있는 남자는 약골이었고, 키도 앉은 남자의 머리가 가슴 높이까지 올라올 정도로 작았다. 전사의 신분이었던 예전의 모습과 비교해도, 발커는 무릎 꿇고 있는 남자보다 확실히 약했다. 게다가 51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겪은 온갖 세상 풍파에 지칠 대로 지쳐 활기를 잃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희끗희끗한 은발이 더 많았고, 야윈 얼굴엔 골이 깊게 파였다. 마침내, 오랫동안 짊어졌던 책임과 의무를 넘겨줄 시간이 왔다. 발커는 이 용맹한 젊은이라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성전기사단(聖殿騎士團)에서 이 남자보다 나은 전사는 없었고, 그건 전 기독교 국가에서 제일 뛰어난 전사라는 말과 같았다. 성전기사단의 기사들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무술 시합에서 거르고 걸러서 뽑은 소수 정예의, 최고의 전사 단체이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젠 더 이상…….바로 두 달 전인 서기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수세기를 걸쳐서 암흑의 날로 기억될 그날, 프랑스의 국왕 필립 4세와 왕의 꼭두각시인 교황 클레멘트 5세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군사 해체를 명령했다. 일부는 도망쳤지만, 성전기사단의 기사들 중 상당수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기사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는 대가로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