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세종 이십팔년, 한양 남산 아래.
두창을 앓던 열네 살 아이가 눈을 떴다.
얼굴은 얽었고, 몸 안에 든 것은 예순다섯 살 남자의 혼이었다.
상고를 나와 경리로 스무 해, 아내와 고깃집으로 스무 해.
마지막 마감을 하고 셔터를 내린 사람.
그가 아는 조선은 90년대 사극 몇 편과 학교에서 외운 연도 세 개뿐이다.
1446, 1450, 1453.
아버지의 이름은 권람.
몇 해 뒤 한명회와 함께 수양대군의 곁에 설 사람이다.
형은 과거를 볼 것이고, 곰보 아우는 과거를 볼 수 없다.
기대가 없는 자리는 감시가 없는 자리.
그는 산가지를 쥐었다.
칼을 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세었다.
창고의 쌀을, 녹일 놋을, 북방 골짜기의 연기를, 돌아오지 않은 배를.
세는 사람은 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정하지 못한다.
놋 조각 하나가 시전을 돌고,
장부 한 권이 바다를 건너고,
얽은 얼굴의 계사 하나가 조선의 셈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