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크래시』에서 『하이-라이즈』로 이어지는 「도심 재난 3부작」은 밸러드가 1960년대에 골몰했던 종말 후 미래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변모 중인 지금 현재’를 다루는데, 당대의 도시를 ‘정신적으로’ 해부하려는 작가 특유의 대담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군이다. 『콘크리트의 섬』은 그중에서 두 번째 소설로, 대도시의 무관심 한가운데서 교통섬에 좌초한 한 남자―콘크리트 지옥의 로빈슨 크루소―의 드라마를 통해 현대의 삶과 세계에 대한 밸러드식 소외의 시학을 보여 준다.
1973년 4월 22일 오후 3시경, 35세의 건축가 로버트 메이틀랜드는 런던 중심부 웨스트웨이 입체교차로에서 과속으로 주행하다 임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재규어에 탄 채로 추락한다. 그는 족히 30미터는 넘는 경사면을 가까스로 기어올라 고속도로로 돌아가지만, 구조를 요청하는 간절한 몸짓에 응답하는 운전자는 한 명도 없다. 설상가상, 비상 전화가 있는 건너편 갓길에 닿으려면 평균 시속 100킬로미터의 3차선 자동차 행렬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간신히 잡은 기회는 결국 그가 도난 차량에 치여 다시 굴러떨어짐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만다.
메이틀랜드는 자신이 세 갈래 고속도로 교차점의 황무지에 생겨난 200미터 길이의 교통섬에 불시착했음을 깨닫게 된다. 큰 부상을 입고 거동마저 힘들어진 그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거나 혹은 자력으로 벗어날 때까지 이곳에 갇혀 망가진 재규어와 차에 실려 있던 공구함, 정찬용 정장, 부르고뉴 백포도주 여섯 병으로 살아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