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1943년 초봄.
휴전 이후 사그라들었던 열전이 다시 전 대륙에 번진 지 2년째.
아인클의 스파이 그레이스가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이안 터너, 그는
그녀의 조국과 가족을 앗아간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는 적국의 스파이였고,
그녀에게 처음으로 참패를 안겨준 남자였고,
그녀의 육체를 탐하기 위해,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남자였다.
“그레이스, 언제까지 날 그렇게 밀어낼 겁니까.”
“...뭘 물어. 네 머리통이 터져 나가든 내 머리통이 터져 나가든, 누구 하나 죽는 날까지 밀어내겠지.”
달라질 건 없을 거라고.
그래,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둘은 흐르는 음악에 맞춰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맞닿은 몸에서 서로의 온기가 번졌다.
따뜻했다.
폐허와 같던 생을 감싸 안는, 그런 따뜻함이었다.
내일 총을 겨눠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품속에서 냉혹한 현실을 잊고 싶었다.
아니, 영영 이 시간 속에 갇혀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런 무한함은 허락되지 않겠지.
3분 남짓한 음악은 끝날 것이고, 그들의 밤도 결국 생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내일의 태양이 밝을 것이다.
“우리가 달리 만났다면…. 결말은 좀 다른 모습이었을까요.”
그레이스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