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세계관에 빙의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
그야 내 눈앞에 사람이 아닌 게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까.
승천하는 뱀 지팡이
날개가 달린 샌들
날개가 달린 모자
모두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것이었다.
그럼 나는 뭐로 빙의 한 거지?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이려나.
설마 정의와 지혜의 여왕 아테나?
뭐가 됐든 너무나 기대되는 두 번째 인생이다.
가슴이 막 벅차오르려고 하는데, 전령사 헤르메스가 정체불명의 포대기를 내게 건넸다.
“…아버지께서 어렵게 살려낸 신성이니 잘 기르도록 해라.”
헤르메스는 대뜸 아버지의 전언이라며 포대기를 떠넘겼다. 그 정체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다.
누가 뭘 키운다고.
제가 제우스 아들을요? 갑자기?
나 여신… 뭐 그런 거 아니었어?
제우스의 아들을 깊은 산속에 키워야 하는 연유가 무엇일까 추측해보니 답은 하나였다. 불안해진 마음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헤라 님께서는…”
“어우. 알면 큰일 나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다. 나,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 것 같아…
“레토를 돕다가 재가 되어버린 님프처럼 되고 싶지 않거든 절대 여신의 눈에 띄지 말거라.”
이거 완전 사망 플래그잖아.
“아, 만일 걸려서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이름을 붙인 성단을 약속하셨단다.”
응응 알지 알지. 죽으면 별자리로 박제되는 거.
나는 신들의 동네북인 님프로 빙의했다.
하필이면 제우스의 사생아를 돌보는 유모 님프로.
이건 전생에 지은 업보인 게 틀림없다.
전생의 마지막 기억은 고진감래 주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미끄러져 넘어진 순간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돌보게 된 아기 신은 훗날 술과 쾌락의 신이 될 디오니소스였다.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또라이라던데.’
디오니소스는 결국 헤라의 저주를 피하지 못하고 광기의 아버지가 된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
뭐야 내 전생 돌려줘요. 앞으로 진짜 열심히 살게요.
*
현실 부정은 길지 않았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때마침 그리스 전역에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졌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에 의하면…
“아기 신을 숨겨준 님프를 찾아다가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라던데?”
전승대로 헤라가 아기 신의 존재를 눈치챘다.
나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다.
여신의 분노와 훗날 맞이할 디오니소스의 광기로부터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이 아기가 장성한 신이 될 때까지 ‘몰래’, ‘잘’ 키운다.
시간이 흐르면 헤라의 기억 속에 분명히 잊힐 것이다.
여신에게만 안 걸리면 광기의 신이 되는 저주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죽지 말고 같이 살아남자 아가야.
*
“당신의 이름은 니사에서 자란 자. 니세우스예요.”
죽은 어미 대신 이름을 지어주고,
“여인의 키톤을 입으세요. 그리고 수줍은 소녀처럼 행동하세요.”
세간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장을 시켰다.
“어어! 친구를 때리지 않아요.”
훗날을 위해 인성 교육도 잊지 않고,
“뚝- 그만 울고 제 품에 안기세요.”
결핍된 가족애를 충족시켜주었더니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유로운 삶.
그런데,
“이 포도주를 다 마시면 제 아내가 되는 거예요.”
나를 바라보는 자줏빛 눈동자가 수상하게 그윽해졌다.
“니세우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엄격하게 길렀다고 자부했는데 버르장머리가 하늘을 찔렀다.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거라면 술김을 빌려 제 품에 안기세요.”
순진무구했던 아기는 어디 가고 웬 여우가 내게 꼬리를 흔든다.
사랑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아름다운 눈과 매혹적인 입꼬리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 님프들에게 으레 일어나는 비극적인 결말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신이 주신 사랑은 영광일까 혹은 달콤한 저주가 될 것인가.
신화 속 한복판에 빠져버린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
* 그리스 신화 기반 + 각색 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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