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빙의한 악녀로서의 소임은 다했다.
성녀 여주와 영웅 남주를 곱게 이어주고, 세계를 멸망시킬 흑막(예정)도 대충 파묻었다는 뜻.
됐다. 이걸로 사망 엔딩은 피했다!
"천백 년만 잠들어 있어. 미안."
흑막이 될 예정이었던 가엾은 남자에게는 들릴 리 없는 사과를 남기고.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책을 덮으시겠습니까?]
결말에 무사히 도달해 나는 미련 없이 탈출했다.
……근데 왜 또 이 모습 그대로, 새로운 백작가에서 눈을 뜬 거죠?
설마 여기 다른 소설임?
나 또 설치다가 죽는 악녀 역할임?
뜻하지 않게 경력직 악녀가 되어버린 이 미치고 팔짝 뛸 상황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더 들어보도록 하지."
무심한 황태자 남주의 눈에 어쩐지 호기심이 비치고,
"당신이니까요. 내 흥미를 끌고 있는 사람은."
서브남은 여주에게 할 대사를 내게 수줍게 던진다.
"역시 황태자 전하보다도 당신이 더 좋아요……!"
아니, 우리 토끼같은 여주 상태는 또 왜 이래?
……까지는 솔직히 전혀 안 놀랐는데.
"그렇게 경악할 정도로 내가 반가워?"
내가 파묻고 튄 흑막, 벨페로스 공작이 왜 여기서 나와?!
천백 년간 잠들긴커녕 세계 지배의 권능을 각성해버린 남자가 붉은 눈을 빛내며 웃는다.
"기쁘네. 한 번도 날 똑바로 봐주지 않았잖아, 전작에서는."
선 너무 넘은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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