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로판에 빙의했다. 남들은 열심히 불 지피고 집 짓는데 민폐 진상짓 부리는 악독한 악녀 황녀로.
“이런 딱딱한 바닥에서는 잘 수 없어요! 당장 내가 쓸 침대부터 만들라고요!”
여주를 괴롭히는건 물론이고, 남주인 황태자와 후작, 그리고 공작과도 사이가 나쁜 이 구역의 미친 황녀가 바로 나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내 역할은, 주연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도구였다.
‘청결도를 유지하는 목걸이, 결계를 생성하는 브로치, 생물을 길들이는 반지, 빛을 내는 귀걸이….’
당연하게도 아직 생존템들은 내 손 안에 있었고.
‘…이거. 악녀라서 오히려 좋은데?’
죽는 엔딩만 피한다면 이 모든 것이 내 것이었기에, 편안한 생존을 위해 서둘러 얌전히 지내기로 했다.
이것저것 파밍도 도와주고. 일손이 부족하면 돕고.
“그동안 죄송했어요, 후작님. 약혼은 파혼하도록 해요.”
여주와 남주 사이를 방해하느라 억지로 유지했던 약혼도 파혼해주고.
“…이제와서 말입니까?”
당연히 오케이 당장 파혼하러 갑시다!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황녀님은 처음부터 그러셨죠. 그렇게 마음대로, 다 필요 없다는 듯이.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어쩐지 불빛에 비춰진 그의 눈동자가 원망으로 물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원하는 것을 쥐어주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짧은 침묵의 순간, 마주한 붉은색 눈동자는 맹수의 것을 닮아있었다.
“저는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를 옭아멜 듯이 타오르는 눈동자에 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 약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
“후작과의 약혼을 파혼한다고 들었다, 리체.”
“…벌써 소문이 났다고?”
“하긴. 그런 무뚝뚝한 놈보다는 다정한 사람이 우리 리체랑 살기에 적합하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더위 먹었어?”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면 좋겠군. 재산은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황가의 이름에 먹칠할 정도는 안되겠지. 이런, 정 맘에드는 남편감이 없다면 나랑 평생 살아도 괜찮은데.”
서로 앙숙이었던 남주, 황태자 오라버니는 여동생밖에 모르는 극성 오빠가 되어있고.
“리체. 내게 다정하게 대해줘.”
황녀를 뻥 차버렸던 북부 공작은 내게 애정을 갈구했다.
“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 평생 살아도 괜찮아.”
…여기서? 맹수가 우글거리고, 재해가 끊임없이 몰아치는데? 얼른 전리품 구해서 제국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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