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만 나를 귀찮게 해요. 이제는 좀 조용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 보고 싶습니다. 누구와도 더는 복잡하게 엮이고 싶지 않아요.
세 번의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라리엘라 맥그리거. 네 번째 삶에서는 제발 편안하고 한적한 비혼의 삶을 열망한다.
그러나 이번 생 역시 열여덟 살에 결혼장사로 북부의 오십이 다 된 대공에게 팔려가게 된다.
다행인 건 그가 병이 깊어 언제 과부가 될지 모른다는 것.
낡은 마차로 한 달이 넘어 걸려 도착한 북부에는 이미 결혼하기로 한 대공이 사망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건 그의 아들인 데릭 아에베아스.
하루바삐 제국의 지붕이자 방패인 북부의 후계가 단단해지길 원하는 중앙의 압박에 그는 아버지 대신 자신과의 결혼을 제안한다. 하지만 라리엘라는 거절한다.
표면상 이유는 아에베아스 가의 사람들은 모두 단명한다는 것.
하지만 사실 그녀는 홀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만을 간절히 원한다. 이에 데릭은 3년 계약 결혼을 제안하고 라리엘라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무늬만 부부를 연기하고 북부에서 이혼 후 독립의 발판을 준비하던 중 데릭이 가문의 저주인지 유전적 요인인지 모를 마력의 폭주로 인해 갑작스레 중태에 빠지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라리엘라에게 그의 병을 낫게 할 방법이 있어 보이는데 그게 하필, 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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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일, 필립에게 들었어.”
그날… 필립… 지금, 이 상황…에 연결되는 사건은 단 하나였다.
모른 척 슬그머니 돌아누워 잠이나 자려 덮어진 그의 코트를 끌어 올려 어깨를 덮었다.
“라라… 난 처음이었어.”
라리엘라가 벌떡 일어나 그를 휙 돌아봤다.
입에서 나오는 말의 내용이 사람의 분위기와 표정에 저렇게나 대척점에 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가? 데릭이? 동정?’
머릿속에서 그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봐도 인지 부조화로 쉽게 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라리엘라가 한동안 눈을 끔뻑이며 결국 제대로 못 알아들어 되물었다.
“당신이 처음이었다고.”
“… 에이… 그러지 말아요. 나한테 그러는 거 아냐.”
웃음기 없는 진중한 그의 표정이, 묵직한 시선이 결코 농담이 아니란 걸 말하고 있었다.
순간 양심의 가책으로 실감 나는 죄책감이 커다란 돌이 되어 머리 위에 쿵 떨어졌다.
‘왓(What) 더(the) 뻐…(fuc….)????’
어디선가 희미하게 철컥철컥 수갑이 그녀의 양 손목에… 채워지는 소리가,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언제나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후안무치의 작전으로 몰고 가자 마음먹었다.
“으응~ 그걸 처음 한 거로 치면 안 되죠. 그때 그 일은 뭐랄까…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누구나! 인간이라면 즉, 사람으로서 응당!!! 위급한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한 응급처치? 그렇지! 심폐소생술! 이라고 하면… 안될까요? 의료적 처치를 누가 한 걸로 쳐요. 그쵸? 하하하… 하하…?”
집게손가락을 세워 까닥거리며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눈의 동공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뻔뻔한 성범죄자라도 이런 허접한 변명은 하지 않겠다며 운이 좋아도 가중처벌을 면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씨… 이실직고 이유 불문하고 납작 석고대죄를 했어야 했나? 아니, 그래도 내가 명색이 생명의 은인인데?’
하지만 황금빛의 형형한 눈동자가 찌를 듯 쳐다보자 치켜세워 들고 있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려 치맛단 속에 감췄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 이어지자 삐질삐질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등줄기가 바들바들 떨렸다.
‘어쩌다… 의식불명인을 덮쳐 이런 굴욕을… 내가 욕망이 충족될 만큼 즐기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저 얼굴을 봐라… 저런 얼굴과 몸을 가진 남자를 생명 연장의 고결한 목적을 가지고 덮쳤노라 장렬하게 외쳐도 어느 누구 하나 믿어줄 것이냐?‘
미계약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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