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물 로판 소설에 빙의했다.
바람둥이 황자가 아카데미 수석인 평민 여주를 꼬시겠다고 친구들과 내기하면서 역으로 여주에게 감기게 되는 클리쉐 소설.
그중 아카데미 교수로 빙의한 나는 조연 악녀였다.
소설 속 내 역할은 간단했다.
남주와 그의 친구들이 하는 내기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어
금세 남주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남주의 마성의 매력도 보여주고,
그런 남주에게 철벽 치는 여주의 강단도 돋보여주면서,
나중에 남주의 관심을 독차지한 여주를 질투해 괴롭히다가,
끝에 교수직에서 잘리면서 사이다 엔딩을 보여줄
소소한 인간 고구마와 탄산 역할이랄까.
하지만 대한민국의 직장인으로 굴러본 내가 무려 정년 보장되고, 연봉도 괜찮으면서 워라벨까지 챙겨주는 이 신의 직장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남주와 절대 이성으로 엮이면 안 돼.”
그래서 남주가 원작대로 나를 유혹하기 위해 연구실로 찾아오자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잘 왔네, 칼리온 군.”
무테안경을 무거운 손길로 벗어낸 나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남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네, 대학원에 올 생각 없나?”
***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황자를 제자로 영입하자마자 연구비가 그야말로 비 오듯 쏟아졌고.
대학원생이라는 명목으로 안 그래도 재수 없었던 황자를 개같이 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황자를 부려 먹던 어느 평범한 날.
“교수님.”
실험을 마친 칼리온이 랩코트를 벗으면서 한걸음 바짝 다가왔다.
흰 코트가 단단한 어깨를 스르륵 타고 내려오면서 청량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서로의 숨결이 섞여들 정도로 가까이 허리를 숙인 칼리온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졸업하면, 저와 결혼해주세요.”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나는 속으로 한숨 쉬며 입을 뗐다.
“칼리온.”
“…….”
“너는 대학원생이고, 나는 교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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