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진다”책은 제국 시대 일본군의 생애사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전쟁을 수행한 당사자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당시의 시대상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즉 개인의 세계관이 전쟁 전에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전쟁기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전후에는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평범한 어린이가 ‘황국신민’으로 사회화된 이후 국가라는 ‘죽음의 운명공동체’를 위해 군에 입대하고, 매일 반복되는 구타 등을 이겨내며 군인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총력전 체제 안에서 인터뷰이들은 철저하게 전쟁 수행의 부속품으로 가공되었다. 국가는 오직 ‘천황’만을 위해 존재했고, 국민의 안위는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았다. 사상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개인의식은 집단의식 안에 고립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개인의식의 동요도 있었지만 표출할 수는 없었다. 개인의 양심과 권리는 총력전 체제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그런 이들에게 ‘야스쿠니신사’는 큰 위안거리였다. 천황이나 국가를 위해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가운데 전우들과 재회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죽음에 직면한 장병들을 위로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야스쿠니신사의 존재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장병들의 사생관에 야스쿠니신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귀에 꽂혔던 단어였다. 야스쿠니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야스쿠니 신앙은 일상화된 죽음의 동요를 억제하는 강력한 장치였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127쪽) “그래서 우리로서는 실로 야스쿠니신사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굉장히 신성하니까, ‘죽으면 야스쿠니에 갈 수 있다고, 죽으면 모두 전우들과 만날 수 있다’고 했죠. 왠지 이제 꿈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식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네, 그러니까 뭐 야스쿠니신사에 들 테니까 무조건 이렇게 열심히 하라는 뜻이죠.”(127~128쪽)책은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형성된 아이덴티티가 전후에도 개개인의 삶에 계속해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주목한다. 이를테면, 기시 우이치 씨는 천황은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천황 덕분에 일본이 성장했다는 신념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생각도 전몰자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천황은 일본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하던 히로토 아키라 씨 또한 야스쿠니신사의 존재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신사는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을 위령하는 시설”이므로 이를 트집 잡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합리하게 강요된 장병들의 죽음을 미화하면서 국민을 통합하는 사상전의 도구로 쓰였던 야스쿠니신사의 기능은 여전히 이들의 삶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자라나다“전쟁 중이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만, 그 당시의 교육이란 결국 말이지요. ‘너희는 폐하의 자식이다. 그러니까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라는 식의 교육이었어요.”(27쪽)제국 시대 일본은 국민의 생명보다 천황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나라였다. 인터뷰이들의 증언에서 개개인을 황국신민으로 빚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광범위한 영역에서 시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제국 일본의 교육 이념은 ‘천황 주권의 절대성’에 기초한 ‘황도주의 국체론’이었다. 학교에서부터 천황과 국체의 신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이뤄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890년에 포고된 ‘교육칙어’였다. 이를 통해 천황의 신성성을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유사시 나라와 천황을 위해 헌신할 것을 주문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시베리아 출정 등 대외전쟁이 진행되면서 국가주의 교육은 더욱 성행했고, 이와 함께 학교를 넘어 일상에서도 이런 교육이 실시되었다.국체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은 단순히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로 사상통제의 영향도 컸다. 제국 일본은 천황 숭배·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저해하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조선독립론과 같은 ‘위험 사상’을 철저히 걸러냈다. 치안유지법의 제정과 특별고등경찰의 등장이 이런 사회의 분위기를 더욱 옥죄는 역할을 했다. 이로써 목소리를 내는 시민은 거의 사라졌고, 복종하는 ‘신민’만이 남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황국신민은 천황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을 요구받았다. “이런 사회의 말로는 참담했다. 군부는 자기 자신의 출세와 보신을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전란의 수렁으로 끌고 갔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즉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벌였다는 ‘사상 탄압’이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파멸에 일조한 셈이었다.”(51쪽)천황의 군인으로 거듭나기“이제는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71쪽)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계속해서 침략전쟁을 일으키며 대외 팽창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진주만공습 이후 연전연승이 이어지긴 했으나 곧 전황은 악화되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의 치명적인 패배와 뒤이어 벌어진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일본의 국운은 급격히 기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 지도자들은 국민의 생명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것을 쥐어짜 어떻게든 전쟁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 시기에 기시 씨와 히로토 씨는 조국 일본이 만주사변 이래 10년 넘게 치르고 있던 대외전쟁에 동원되었다.기시 씨는 당시 제국 일본의 중요한 전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입대를 결심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공습을 성공시켜 일약 영웅이 되었으나, 1943년 미군기의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소년 기시 우이치는 자신이 전장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위해 입대를 선택한 기시 씨에게 국체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은 ‘죽음의 운명공동체’였다. 히로토 씨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원래는 징집유예 대상이었으나 전황이 악화하면서 그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에 따라 학도출진하게 되었다.근대국가가 출범한 이후 전쟁 규모가 확대되었고 동시에 전쟁의 양상 역시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총력전’으로 변화했다. 총력전 체제는 전쟁에 대한 전 국민 규모의 동원이 전제된다. 그야말로 ‘죽음의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이 죽음의 운명공동체는 군대 내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지배하는 사실상의 종교가 되었다. 때문에 인터뷰이들은 입대와 전쟁 수행에 관해 어떤 이견도 낼 수 없었고,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구성원들이 가지는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전쟁 동원에서 발생하는 동요나 반발을 억제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히로토 씨는 장교로서의 책임감, 국민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죽음의 각오를 다지기까지 했다. 자신의 임무를 ‘죽는 것’이라고 강하게 인식했던 그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이를 억제하게 했다. ‘죽음의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이 전쟁에 동원되는 개인의식에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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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page2023/01/05
  • 現在の作品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단행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