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빙의했다. 하필이면 고구마 가득한 책의 여주인공으로.
왕의 서녀로 태어나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어 가는 그 고구마 팔자,
내 손으로 스프라이트 샤워를 시켜 주기로 했다.
폐관 예정인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발견한 책 한 권.
가득 쌓인 먼지를 털어 보니 낡은 벨벳 표지에 바코드도 없기에 냉큼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갔다.
로잔틴 왕국의 마지막 딸이자 신녀 일족의 피를 이은 오필리아 왕녀가 주인공이었는데,
무능하고 욕심만 많은 왕과 이복형제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더라.
심지어 갖은 고생 끝에 사이다가 나올 법한 시기가 왔는데도 반전 하나 없이
그대로 모든 것을 잃은 채 독살당하기까지. 마지막 장은 또 어디 갔는지 뜯긴 흔적만 남아 있다.
어이없는 결말에 혼자 분통을 터트리다 끝내 오필리아를 탓하던 순간, 어디선가 작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그 목소리와 싸우듯 대화하다 툭 튀어나온 혼잣말.
"나라면, 그렇게는 안 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목소리는 슬픈 통보를 건넸다.
"그럼, 네가 해 봐. 이제부턴 네가 오필리아야."
약속한 대로 여주는 어린 오필리아의 몸으로 깨어났다.
아직 세상은 막장으로 흐르기 전이었고, 충분히 도박을 해 볼 만했다.
여주는 신녀인 어머니에게 내가 미래의 오필리아를 만나고 왔다는 진실 반 거짓 반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이 본 미래의 내 모습은 여왕이었다는 말과 함께.
로잔틴은 대대로 어린 신녀를 통한 신탁이 왕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전설이 내려왔기에,
뜻밖에도 그녀의 치기 어린 말은 왕에게 제대로 먹힌 듯했다.
여주는 왕국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던지며 신력을 선보였고, 국왕은 금세 그녀를 보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다운 말투와 깜찍한 행동으로 왕궁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는 소설 속 오필리아를 핍박했던 정적들을 하나씩 치워 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