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플라시보, 노시보
플라시보 효과…….
위약효과.
플라시보 효과란 약효가 전혀 없는 거짓약을 진짜 약으로 가장, 환자에게 복용토록 했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효과를 말한다.
'플라시보'란 말은 '마음에 들도록 한다'는 뜻의 라틴어로, 가짜약을 의미한다. 만성질환이나 심리상태에 영향을 받기 쉬운 질환에서는 이 플라시보를 투여해도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플라시보 효과'라 한다.
노시보 효과…….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와는 반대로 진짜 약을 줘도 환자가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것
지유는 열아홉 나이 때부터 시작해서 9년을 사귄 남자 친구에게서 이별통보를 받았다.
그 일만으로도 휘청거려지는데, 집안의 우환과 함께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난다.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 괴로워하던 차에 친구와 우연히 점을 보러가게 되고 거기서 엉터리 점쟁이를 만난다. 다른 점쟁이와 달리 출처를 모르는 약을 자꾸 권유해준다. 급기야는 부적을 덤으로 준 댄다. 그런데 그 약이 보통 약이 아니라는 거다. 자신이 내려준 처방대로 행동을 하고 그 약을 먹으면 좋은 일만 생길 거라는 거다. 그런 헛된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지유였지만 한없이 마음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그 약이 한 가닥 희망이라 여기고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하루에 한 알 씩 복용하라는 지시에 따르기로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후부터 지유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민지유: 밝고 맑았던 성격이 하루아침에 어둡게 바뀐 것은 순전 배신한 남친 때문이었다. 9년간 같이 했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 놈을 다시 되돌아오게 하고 싶다. 마음이 약해지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지 점쟁이의 말만 믿고 덜커덕 부적과 함께 약을 얻어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점쟁이가 하는 대로 하니까 좋은 일만 연달아 생기게 되었다. 그런 걸 인생 역전이라고 하는 건지…….
최현우: 서른이 되도록 모아 놓은 재산 없고, 돈 안 되는 다큐 찍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은 통에 아까운 청춘의 시간을 야금야금 까먹고 있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당연히 연애를 꿈꾸지도 못했는데 지유의 등장과 함께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연히 만난 장소에서 그녀의 눈물이 그의 손등에 떨어지자 여자에 대해서만은 딱딱하게 굳어있던 심장이 점점 말랑말랑해지고 말았다.
최현준: 현우의 띠동갑 형. 남들이 부러워하는 궁전이라는 이름이 뒤에 붙은 아파트에서 아들과 외롭게 살고 있다. 정확하고 까칠한 성격 때문에 털털한 현우가 못마땅할 때도 있다. 그래도 본인 혼자 아들을 키웠다면 아들 영진이 힘들었겠지만 형처럼 따뜻한 현우가 옆에 있어줘서 든든하다. 어느 날, 버석거리는 그의 가슴에 새로운 봄바람이 들어왔다.
최영진: 현준의 중학생 아들. 학원에서 선생님으로 만난 지유에게 첫눈에 반한다. 또래에게서 느낄 수 없는 지유의 다정함에 학원가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그런 그녀가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이에 어떻게 하든 지유를 다시 만나기 위해 좋은 방안을 찾아낸다.
정준영: 명문대학을 나왔어도 돈 없고 빽 없는 놈은 제자리에서 헛발질만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게 된다. 성공에 목마른 그에게 나타난 능력 있는 상사는 그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중학생 딸을 둔 이혼녀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일하느라 놓쳐버린 젊음을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에게 그런 것마저도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다만, 9년간 자신만 바라보던 지유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지유가 나섰다.
“제가 넥타이 맬 줄 아는데 남을 매 준 적은 없어서…….”
그거라도 어디인가 싶어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괜찮아요. 사람 하나 살려 준다 셈치고 부탁드릴게요.”
여태껏 보아 왔던 허술한 모습과 달리 그가 진지하게 부탁을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제가 뒤에서 맬게요. 내가 매듯이 매면 매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에서 매면 잘 모르겠거든요.”
전에 딱 한번 준영의 넥타이를 매 주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바로 지금의 이유 때문이었다.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인데도 지유는 유독 방향치였다. 방향감각이 제로 수준이라 지금껏 운전면허도 따지 못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앉아 계시면 제가 뒤에서 매 드릴게요.”
그의 키가 워낙 커서 그가 선 상태로는 넥타이를 매기가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부탁드릴게요.”
현우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그 모습을 보고 묘한 기류를 감지한 영진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너무 앞으로 숙이지 마시고 뒤로 약간 젖혀 주세요.”
지유가 무릎을 바닥에 닿은 채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현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고 이 장면 역시 놓치지 않고 있던 영진은 검도 학원에 가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서서 매섭게 감시하고 있었다. 지유는 현우와 친숙한 사이가 아니라 되도록이면 터치 하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그렇게 조심하는 것이 더 감질 맛나게 만들어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뒤에 서 있는데도 느껴지는 그녀의 달콤한 숨결에 깊은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현우가 눈을 감으며 제대로 느끼는 눈치인 것 같자, 불끈 쥔 영진의 두 주먹이 질투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미팅 잘 할 것 같아요. 집에 가시는 길이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현우의 말에 도복을 입고 방에서 나오던 영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삼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선생님은 버스 타고 가신대!”
“버스 타고 가시는 거리라면 제가 가다 내려 드릴게요.”
현우는 영진이 전혀 안중에 없는 듯 지유만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단호해서 그녀는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이 나가 버리자 영진은 서둘러 신발을 꿰어 신고 따라나섰다. 그러나 이미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분한 마음에 영진은 엘리베이터 문을 쾅하고 쳤다.
“내 허락도 없이 우리 선생님을 데려갔어. 삼촌 어디 두고 봐.”
씩씩대는 영진의 모습은 영락없이 엄마를 형에게 빼앗긴 여섯 살 아기의 모습이었다.
현우는 차를 몰면서도 눈동자는 흘끗흘끗 지유를 보고 있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사는지라 금세 목적지에 다 와 가고 있었다.
“저기 사거리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아, 그런가요?”
그녀의 집이 가까운 거리라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미친 척 하고 데이트 신청해 볼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기회를 엿보던 그의 입이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핸들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자신에게 스스로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던 현우의 입에서 드디어 소리가 나왔다.
“데. 데. 데…….”
“네에?”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말을 더듬나 싶어 내리려다 말고 지유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은 못하고 얼굴만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순간접착제를 붙여 놓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데이트라는 말이 이렇게 어려운 말인지 몰랐다. 떨리는 숨결을 감추기 위해 숨을 한껏 참고 있던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푸핫,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까?”
“네에?”
그건 무슨 말인가, 데려다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라는 뜻인가, 그렇다고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까?’는 문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문장인지…….
당황해 하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현우는 그 자리에서 차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때는 머리 좋다고 칭송이 자자했던 그였는데 말이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유는 그런 그의 마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차문 손잡이를 잡았다. 막 나가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그에게 몸을 던졌다. 마치 폭탄을 피하려고 엎드리는 자세로 그녀는 그의 무릎으로 몸을 숙였다.
그가 조금 더 이성을 잃었더라면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좋아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은 그도 알기에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고 그도 어찌 할 바를 몰라 그저 숨을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