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늘 곁에 있어서,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볼 수 있어서, 고개만 돌리면 금세 찾을 수 있어서, 그래서 놓쳐버릴 뻔했다.
많이 늦었지만, 결국 깨달았다. 너밖에 없었다는 것을.
너 때문에 내 마음에 빈 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너로 인해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 직진한다. 너를 향해. 거기 그대로 있어. 제발.
-본문 중에서-
“너 집 비우면 나 밥 못 먹어. 애들한테 물어봐. 너 대전에 며칠씩 다녀올 때마다 살이 죽죽 빠져. 잠도 못자. 그래서 형한테 혼나. 일 안 하고 멍 때리고 있다고. 잘 하던 것도 실수하고 버벅대고 아주 난리가 나. 일상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다고. 근데 그 일들이 너 없을 때 일어나니까 너는 모르더라고. 너 없을 때마다 난 죽어 나가는데, 넌 하나도 모르더라고. 형이나 애들이 도와주면 좋겠는데, 절대 안 그래. 나더러 알아서 하래. 숨도 못 쉬고 있는 나를 구경만 해. 하아…….”
이현이 조금씩 격앙되어 갔다. 말이 뒤죽박죽으로 쏟아졌다.
“너도 알다시피 나 여자 많았어. 근데 나, 한 번도 마음이 제대로 움직인 적은 없었어. 그래서 쉽게 끝낼 수 있었어. 근데 그게 한갓져야 하는데 괴롭더라고. 주변에서 바람둥이라고 할 적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만날 적마다 그랬어. 이번엔 뿌리 내려야지. 만나다 보면 마음이 가겠지. 근데 안 되더라고. 그러니까 악순환이었지. 그게 다 내 마음에 구은호밖에 없어서였어. 자리가 있어야 뭐가 들어오든지 말든지 하지. 그걸 몰랐던 거야. 미치겠는 건, 안 됐으면 아무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거야. 정수도 나래 사랑해서 만나기 시작한 거 아니니까. 만나다가 사랑한 거니까. 나도 만나다 보면 그럴 수 있을 줄 알고. 나도 사랑이란 게 하고 싶어서. 미친 거지. 그게 그거가 아닌데.”
은호는 그저 들었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네 마음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열심히 살다 보면 은호가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줄 거야, 그렇게 생각했어. 허지훈이 소나기처럼 너를 적셨다면, 나는 너한테 안개비처럼 스며들려고 했어. 이미 친구니까. 그래서 2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버텼어. 근데 저번에 너, 허지훈 만나고 울면서 들어오는데, 정신이 확 드는 거야. 이러다가 나도 모르는 새 구은호한테 소나기가 내려 버리면, 그래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나한테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겠구나. 난 영원히 아웃이겠구나.”
이현이 은호를 와락 끌어안고는 팔에 힘을 주었다.
“은호야. 나 무서워. 겁나 죽겠어. 너 다른 사람한테 갈까 봐 살 떨려. 나 너 가지게 해줘. 내 몸, 정말 더럽게 헐었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마음은 새 거니까 그거 하나 믿고 나 받아 줘. 함부로 몸 굴린 거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그래도 나 좀 살려 줘, 은호야. 나 너하고 하나 할래. 그렇게 해줘. 그래야 너 딴 데 안 가지. 구은호는 책임감 넘치는 사람이니까. 은호야, 나…… 너 없으면 정말 망해.”
“곽이현.”
“어?”
“나 너 안 사랑해.”
“알아. 당연하지. 날 어떻게 사랑하겠어.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너왔는데. 더러워 죽지. 그래도 친구라고 싫어하지 않고 좋아는 해주잖아. 챙겨 주기도 하잖아. 옛날처럼 한심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잖아. 철들었다며. 예쁘다며. 그거면 돼. 그거면 되는데, 내가 죽을 거 같으니까 너랑 하나 되게 해달라고.”
“나 너 믿지도 않아.”
“알아. 그것도 당연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나 같은 걸 뭘 보고. 아, 은호야. 나 다 안다니까. 근데도 이러는 나를 좀 봐주면 안 돼?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너 가지게 해줘. 제발, 제발. 불안해서 정말 죽을 거 같아.”
“이현아. 나 정신없어. 밝은 데서 얘기하자. 불 좀 켜볼래?”
“안 돼. 나 창피해서 안 돼. 아, 은호야. 여기 만져 봐.”
이현이 셔츠를 걷어 올리고는 은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갈비뼈에 대고 문질렀다.
“나 마른 거 봐. 뼈밖에 없잖아. 구은호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이러다 진짜 죽을 거 같아. 자꾸 영양제만 주지 말고, 너를 주면 돼. 제발, 은호야. 응?”
은호의 이성이 점점 마비되어 갔다. 어려서도 그랬다. 이현에게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름 ‘냉철’한 은호였음에도, 이현이 한 번씩 작정하고 고집 피우며 매달리기 시작하면 결국엔 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