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문명사회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법률이나 관습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하여 사랑도 바람직한 사랑, 금지된 사랑, 평범한 사랑, 어려운 사랑, 불가능한 사랑 등으로 세분화되고 이러한 사랑의 세분화는 인간군상의 속물근성과 결합하여 사랑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부러움을 받을 사랑과 비난받을 사랑으로 결론지어지고 만다.
하지만 욕망은 이러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만들어낸다.
이혼하고 혼자서 딸을 키우는 혜임은 보험영업을 하던 중에 열 살이나 어린 법대생 석호를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만다.
육체적 욕망은 종종 하등하고 더러운 것으로 폄하되지만 관념화된 사랑보다 훨씬 솔직하고 순수하다.
혜임과 석호의 사랑은 그래서 욕정이 아닌 순정이 되고 더럽지 않고 애틋한 사랑이 된다.
- 본문 중에서 -
문이 열리자 오전에 보았던 예쁜 남학생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서 있었다. 혜임은 혈중 알콜의 힘을 빌려 자신을 소개했다.
“난 안혜임이야. 나이는 서른 셋. 작년에 이혼하고 혼자서 여섯 살짜리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지. 아이 낳고 살이 좀 찌긴 했지만 몸매는 아직 봐줄만 해. 물론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몸매는 아니지만 말이야.”
우석호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지만 기쁜 표정이었다.
“들어오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먹고 왔어. 뭘 먹었는지는 묻지 마. 별로 로맨틱하지 않으니까.”
혜임과 석호는 방바닥에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마치 보험 상담을 하러 온 상황이었다. 석호가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TV좀 틀어볼까요? 아까 ‘내 아들 국진이’하던데.”
“내가 고작 드라마나 보자고 널 찾아온 줄 아니.”
“그, 그래요? 그럼, 음.”
석호는 어쩔 줄 몰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혜임은 석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혜임과 석호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혜임은 석호의 붉은 입술을 응시하며 말했다.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뭔데요?”
“날 아줌마라고 부르지 마.”
“알았어요. 누나.”
“좋았어.”
혜임과 석호의 입술이 서로 포개졌다. 석호의 부드럽고 달콤한 혀가 혜임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혜임은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키스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다리가 풀렸다. 석호는 단단한 팔뚝으로 무너지는 혜임을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미리보기]
프롤로그
임대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강남 임페리얼 타워 지하주차장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와 주차했다. 감색 정장을 입은 운전기사는 재빨리 움직여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모피코트를 입은 오십대 중년 여성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손에는 납작한 서류가방이 들려 있었다. 기사가 정중하게 절을 하며 차문을 닫았다.
“흥, 정말 건방진 고객이야.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녀는 투덜대며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그녀의 머리는 새카맸으나 염색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눈가에도 잔주름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곱게 늙은 얼굴이었다. 꽉 다문 입술에서는 커리어우먼의 굳센 의지와 인내심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는 타워 최상층부에 속하는 42층에서 멈췄다. 전망이 좋고 사무실 평수가 넓어서 VIP고객들이 입주해있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리문 뒤로 청림 법무법인이라는 커다란 금속 간판이 보였다. 간판 밑으로는 안내 데스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새침한 얼굴의 젊은 여자애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서 대표님 만나러 왔는데요. 한성생명에서 왔다고 전해주세요.”
“약속하셨습니까?”
“네. 서 대표님이 보자고 해서 온 건데요.”
도도한 표정의 여자애는 인터폰과 통화를 해보더니 이내 호텔 종업원처럼 굴었다.
“들어가세요.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커다란 사무실 안에는 두꺼운 유리로 구분된 방들이 여러 개 있고 방마다 흰 셔츠를 입은 법률전문가들이 산더미처럼 서류를 쌓아 놓고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서 가장 안쪽에 있는 서 대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특허소송과 기업소송에서 국내 최고 승소율을 자랑하는 법무법인 대표의 집무실치고는 매우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투박한 책상 한 개와 소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 벽은 책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인규 대표 변호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훤칠한 키의 대표 변호사는 통유리 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이십 년 보험영업을 하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청림 법무법인 대표께서 저를 직접 보자고 하시다니, 좀 놀랐습니다.”
“왜요, 영광인가요?”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 있다. 그에게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보다 더 중요한 일 같았다. 그녀는 따끔한 지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고객과 보험설계사의 관계를 지나치게 수직적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에게는 보험이라는 인류 최대의 발명품에 대해 고마움을 가져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 요구된다.
“아뇨. 연금보험을 들기 위해 지역본부장을 개인 사무실로 불러들이는 간 큰 사람은 아직 없었거든요. 한번 보고 싶었어요. 어떤 분인지.”
“하하, 당당하시군요. 하긴 안혜임 본부장님 같은 분이 고작 보험 상품 하나 팔자고 여기까지 오시진 않았겠지요.”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그렇게 뒤돌아 서계실 거죠? 뒤통수에 대고 보험약관을 설명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녀는 벌써 가방에서 계약서류를 꺼내 유리탁자에 깔아놓는 중이었다. 이런 불쾌한 고객을 만난 경우에는 신속하게 서명을 받아서 사라지는 것이 상책이었다.
“제 얼굴을 보여드리기 전에 안혜임 씨께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서인규 대표가 아닙니다. 안혜임 씨를 만나고 싶어서 대표님의 이름과 사무실을 잠깐 빌린 것뿐입니다.”
혜임은 만년필을 탁자에 떨어뜨렸다. 그제야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 대표님이 아니시라면, 누구시죠?”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훤칠한 키에 지적인 얼굴을 가진 사십대 초반의 남자였다.
“청림의 파트너 변호사인 우석호입니다.”
혜임은 눈이 빨개졌지만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 다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객님이 안 계시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우 변호사는 달려들어 서류를 챙기는 혜임의 손목을 잡았다.
“왜 이러시는 거죠?”
“고객은 바로 접니다. 그 상품, 제가 계약할 겁니다.”
“이건 서 대표님의 재무상황에 맞게 설계한 상품입니다.”
“그럼 다시 설계해주세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계약할 순 없어요. 상담한 후에 돌아가서 다시 서류를 꾸며 올게요.”
“그러죠. 혜임 씨를 또 만날 수 있다면 저로선 환영입니다.”
그녀는 마지못해 시스템 다이어리와 서류양식을 꺼냈다. 이제는 완전히 냉정을 되찾아 차갑고도 계산적인 안 본부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 변호사님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훗, 아시면서. 올해 마흔 넷입니다.”
“직업은 변호사. 연간 수입은요?”
“성과급 때문에 들쑥날쑥합니다. 작년에는 9억 원 정도 벌었습니다.”
“주택은요? 소유인가요, 전세인가요?”
“소유입니다. 서초동에 있는 그레이스 빌라 1개 층을 갖고 있어요.”
“결혼은?”
“했습니다.”
“부인은 직업이 있나요?”
“전업주부예요. 음대를 나왔죠.”
“자녀는?”
“딸 하나. 지금 중학교 1학년생입니다.”
“한 달에 불입할 수 있는 보험료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요?”
“잠깐만요. 저도 질문 좀 하죠.”
“질문은 제가 하는 겁니다. 본인이 계약하실 거 아닌가요?”
“저도 혜임 씨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혜임은 잠시 갈등했다.
“원하는 게 뭐죠?”
“없습니다. 그저 지나가버린 세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에요. 지금 이 나이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