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어릴 적, 옆집에 사는 3살 위의 오빠에게 만날 괴롭힘만 당해온 주세림.
악마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그가 대학을 가게 되면서 겨우 벗어났다 싶었는데,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악마는 마왕으로 업그레이드 되어 그녀가 대학을 다니게 될 서울에서 치밀한 덫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한 서울에서 하필이면 옆집 악마가 하숙집 주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림. 처음에는 거북하기만 한 악마와의 동거생활이었지만, 3년만에 만난 악마는 어쩐지 이전과 다른 느낌인데....?
자신을 싫어해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꼬마마녀 주세림과, 그런 그녀가 귀여워 견딜 수 없는 마왕(?) 황선우의 엇나가는 대화의 캐치볼.
과연 그들은 서로의 일방통행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제대로 서로를 마주볼 수 있을지?
본편 뒤의 외전으로 세림의 친구들인 윤하와 윤서의 이야기, 그리고 후일담격인 도 수록된 수정판입니다.
-본문 중에서-
이건 악몽이야.
서울역 한복판에서 여행 가방을 옆에 쥔 세림은 눈앞에 펼쳐진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꿈에서까지 저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박이고 볼을 꼬집어도 눈앞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점점 더 환하게 그려 가며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세림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건 악몽이야! 빨리 눈을 떠, 주세림!
“서울에 온 걸 환영해.”
하지만 악몽은 깨어나지 않았고, 현실감 넘치는 음성을 포함하여 자신에게 미소 지었다.
“화, 화, 화, 화…….”
“하하핫, 오랜만에 봐서 그래?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황선우잖아, 내 이름은. 자, 따라 해봐. 황. 선. 우.”
“화, 황선우!”
“그래. 잘 했어.”
동결에서 겨우 풀려난 세림의 외침에 눈앞의 남자, 황선우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지나가던 여자들이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것이 곁눈질로 보였지만 세림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건데?
“어머님께 말씀 못 들었어? 네가 지낼 집 주인이 나라고.”
“하아?”
“4년간 딸을 잘 부탁한다고 하시길래 다 얘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듣지 못했나 봐?”
물론 듣지 못했다. 세림이 들은 것은 부모님이 잘 아는 믿을만한 사람의 집에 방을 구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부모님을 대신하여 자신의 보호자 대리를 맡게 된다는 말 뿐이었다. 결단코 악마가 자신을 맞이하러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충격으로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세림을 지켜보던 선우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일단 여긴 사람이 너무 붐비니까 집으로 가서 얘기하자.”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세림을 대신해 선우가 여행 가방을 잡아끈다.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세림이 자신이 들겠다고 말했으나, 선우의 제지로 결국 주차장까지 빈손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얼른 타.”
“…….”
조수석이 열린 것을 보아 자신에게 타라고 하는 뜻인 것 같기는 한데, 올라타기가 너무 무섭다. 한갓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비로 사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를 바라보며 세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 타고 뭐해?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뇨.”
“그럼 잔말 말고 빨리 타. 퇴근 시간이 겹치면 밀려서 더 늦어지니까.”
“…….”
하는 수 없이 세림은 조수석에 몸을 앉혔다.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하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문이 잠겼다. 그 소리가 왠지 도망 못 간다는 경고음으로 들려 세림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무거운 침묵 속에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세림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기 위해 상경했고, 하숙할 집의 주인이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엄마는 집주인의 말을 최대한 잘 들으라고도 했었고……그런데 집주인이 악마란다. 어떡하면 좋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창밖을 응시하며 사고를 처리해 나가던 세림의 몸이 오한으로 부르르 떨렸다.
[미리보기]
1. 악연의 시작
초등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세림은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옆집에 신세를 졌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는 세림의 엄마와 달리 전업주부로서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을 자주 만들어 주시는 좋은 분이었다. 언제나 자신은 딸을 갖고 싶었다는 아주머니는 세림을 친자식처럼 살뜰히 보살펴 주었고, 세림 역시 친부모님 다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그런 아주머니에게는 자식이 둘 있었는데, 첫째는 당시 중1이었던 장남이었고 둘째는 세림보다 3살 위의 남자아이였다. 중학교에 올라간 장남은 초등학교 1학년생인 세림과 학교에 오는 시간대가 달라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고,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옆집의 어린아이가 잠시 놀러 온 것이라 여겨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둘째 아들은 매번 찾아오는 세림이 못마땅했는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를 괴롭혔다.
“또 너희 집에는 아무도 없는 거야?”
“넌 친구도 없어? 매번 여기에만 오게.”
“너희 엄마한테 말해. 너 좀 제대로 보살피라고. 언제까지 우리 엄마한테 맡기고만 있을 거냐고.”
초등학생에게 3년의 차이는 무서울 정도로 컸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남자아이. 소년과 만나기가 무서워진 세림은 점차 옆집에 놀러 가기를 꺼려했고, 대신에 친구의 집에 가서 노는 일이 많아졌다.
“야,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놀고 있는 거야. 빨리 이리 안 와?”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년은 여전히 세림의 앞에 나타났다. 부모님이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친구와 함께 놀다 저녁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갔다.
“바빠 죽겠는데 귀찮게 굴지 마. 내가 이렇게 널 꼭 데리러 가야 해?”
데리러 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은 내리꽂는 차가운 눈길에 다시 삼켜졌다. 퇴근이 늦는 부모님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세림은 소년의 손에 이끌려 옆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세림이 홀로 요리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어졌다.
“주세림, 너 회장 오빠 옆집에 산다는 거 진짜야?”
“우와, 정말? 나 너희 집에 한 번 놀러 가도 되지!”
3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번에는 반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세림에게는 악마나 다름없이 구는 소년은 그녀 이외에는 사교성이 좋은 건지 어느 사이엔가 학생회장이 되어 학교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같은 반의 여자아이들은 이번에 당선된 회장이 아이돌 오빠들보다 더 잘생겼다 난리였고, 남자애들은 운동도 공부도 완벽하다면서 동경의 시선을 보냈다. 물론, 소년의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아는 세림은 그저 마른 웃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옆집 선우가 이번에 전교 일등을 했다더라. 대단하지?”
어느 주말 저녁, 모처럼 가족이 모두 모여 단란하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나온 화제에 세림은 순간적으로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콜록!”
“어머, 얘. 괜찮아? 어서 물 마셔.”
“콜록콜록……그, 근데 갑자기 옆집 오빠 얘기는 왜 꺼내는데?”
그간의 경험으로 보건데 옆집에 사는 소년과 관련되면 지나가는 얘기조차도 세림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엄마를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아니. 이제 너도 슬슬 보습학원 같은 델 보내야 하나 생각중인데 바로 옆집에 우수한 인재가 있다니까 차라리 걔한테 맡기는 건 어떨까 해서.”
“아아. 그러고 보니 옆집 아이는 학원도 안 다니면서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지? 비결이 뭐래?”
엄마의 얘기를 들은 아빠도 흥미가 생기는지 감탄을 하며 물었다.
“원래 머리가 좋은가 봐요. 아이큐 측정을 했는데 150이 넘는다나 어쩐다나. 게다가 남을 잘 돕는 성격이라 우리 세림이를 얼마나 잘 돌봐주는지. 내가 야근할 때마다 매번 저이 엄마를 통해 문자를 보낸다니까요? 세림이는 자기네 집에서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호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대단하네. 요즘 애 치고 정말 된 애로군.”
“그렇죠? 그래서 세림이도 이제 슬슬 성적을 신경 써야 할 나이고, 기왕 선생을 두어 가르칠 거 옆집 선우한테 부탁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집도 가까운 데다 믿을 만한 곳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거 좋네. 한 번 부탁해 보지 그래?”
“안 그래도 내일 당장 선우네 엄마한테 물어보려…….”
“어, 엄마! 잠깐만!”
세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옆집 악마에게 붙잡혀 원하지도 않는 과외 수업을 받는 것도 모자라 잔소리 풀코스의 지옥을 맛봐야 할지 모른다. 공부도 공부지만, 배우는 내내 비아냥댈 소년의 삐딱한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 세림이었다.
“우, 우선은 이번 기말고사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해 줘! 응?”
“뭘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니. 이번 주부터 시작하면 기말고사 성적이 올라갈 수 있잖아?”
“나 열심히 할 테니까! 전교 일등은 무리이더라도 전교 10등 안에는 들을게!”
“어머 웬일이니 네가?”
“그……그게, 옆집 오빠도 6학년인데다 내년에는 중학생인데 괜히 우리 집에서 부탁해서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면 안 되잖아! 그리고 그 오빠, 학생회장이라 무지 바쁘다고!”
“오오……학생회장이기도 해? 진짜 대단하네.”
“아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아무튼 나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할 테니까, 성적이 안 좋으면 그때 부탁하기로 하자, 응? 엄마 부탁이야!”
“……네가 정 그렇다면야…….”
두 손을 모아 비는 세림의 행동에 놀란 엄마가 약간 뒤로 물러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처음 보는 딸의 모습에 기겁을 한 것이겠지. 하지만 알면서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남은 미래가 걸려 있었으니까. 그날 저녁부터 세림은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에 매진했다. 부모님이 간식을 먹으라고 불러도, 친구들이 놀자고 초대해도 굳건히 문제집을 풀었다. 좋아하는 과목은 물론, 싫어하는 과목 전부의 문제집을 독파했다. 그런 눈물겨운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세림은 입학한 지 처음으로 전교 3등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부모님은 우리 애도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애라고 기뻐했고, 반 친구들은 놀람과 감탄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에. 이번에는 꽤 노력했나 보네?”
학년도 다른 주제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아마도 엄마가 옆집 아주머니에게 말을 했겠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등장한 소년이 말을 걸었다.
“초딩이면서도 성적이 겨우 반에서 중간 조금 넘어가는 정도라고 해서 내가 친히 가르쳐 주려고 했더니만……아,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 성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으니 다음부터는 내가 가르쳐 줘야 하나?”
“!”
핏기가 가셔 얼굴이 새파래지는 세림을 응시하면서 소년은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난 이래봬도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거든. 중학교에 올라가서 과목이 달라지기는 해도, 너 하나 정도는 문제없이 가르칠 수 있어. 그러니까……다음부터 잘 해보자?”
학교의 여자애들이 보면 환호성을 지를 소년의 미소 너머로, 세림은 악마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녀는 남들이 뭐라 하든 죽어라 공부에 매진해, 졸업할 때에는 전교에서 내로라하는 우등생이 되었다. 이 모든 공은 전부 옆집에 사는 악마에게 돌린다며, 세림은 졸업식 대표로 답사를 끝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악몽과도 같은 초등학교 생활을 마친 뒤 새로이 맞이한 중학 생활은 이전에 비하자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학교 자체는 그 악마가 다닌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그녀가 입학할 때에는 이미 졸업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이 가끔 두려워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만이 의문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더욱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3 수험생이 되었어도 끈질기게 자신이 나온 중학교에 얼굴을 내밀던 악마가 마침내 대학에 입학해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도 수재들만이 모인다는 최고 대학에 입학한 그는, 떠나기 전날 일부러 세림을 불러내는 만행을 저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없다고 해서 멋대로 남자를 사귀거나 소개팅 같은 짓을 하기만 해봐. 당장 내려와서 갈라놓을 테니.”
“……하아?”
“물론 네 주변에는 이미 못을 박아 놓았으니 그런 간 부은 짓을 하는 인간은 없겠지만……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알았어? 내 허락 없이 남자를 사귀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어. 고딩은 고딩답게 열심히 공부나 해. 종강하면 바로 내려와서 공부 봐 줄 테니까.”
“…….”
이 인간은 어디까지 사람을 괴롭혀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세림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는 이곳저곳에서 커플들이 손을 잡고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남자를 사귀기는커녕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어 본 적 없는 모태솔로인 자신을 저주라도 하느냔 말이다! 기가 막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어느새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사라진 남자를 향해 세림은 속으로 분노를 퍼부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협박을 완전 무시해 버리고 방학을 연애에 매진하고 싶었지만, 허튼소리는 죽어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만에 하나 들킬 경우 나중이 어떻게 될지 두려웠기에 세림은 얌전히 예습에만 충실했다. 그러나 막상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니 뭔 일인지 악마는 방학이 되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림은 시원하면서도 왠지 울컥하는 마음에 이를 갈았다. 오겠다고 했으면 와야 할 것 아냐! 대학생이 되니 노는 데 정신이 팔렸다 이거지! 흥, 팔자 좋으시겠어! 내가 이제 네놈 말을 듣나 봐라!
고2가 되어도 악마가 나타나지 않자 세림의 마음에는 슬슬 딴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건 잘 알지만, 살짝이라면 들키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 반, 악마에 대한 대항심 반으로 남친이 있는 아이들에게 소개팅을 주선해 달라 부탁했지만 어째서인지 모두 하나같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그리고는 나름 충고랍시고 하는 말이 세상은 넓으니 대학에 가면 마왕에 대적할 수 있는 고레벨의 용사를 찾아보라고 했다. 세림은 그들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연애 한번 하지 못하고 오로지 입시 공부에만 치이다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일단 원하는 대학에 1차로 합격했으니 3년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는다고 세림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입시 스트레스에도 벗어났겠다, 모든 고3들이 꿈꾸는 대학생활을 마음껏 누리라 다짐하며 한껏 들뜬 세림에게 그녀의 어머니가 말을 했다.
“너, 진짜 서울에서 잘 지낼 수 있겠어? 엄만 걱정이다. 네가 이상한 애들과 어울릴까봐.”
“엄마도 참. 내가 어린애인가? 나도 이젠 스무 살이니 내 앞가림은 할 수 있다고요. 걱정 마시길.”
“말은 그렇게 해도 세상이 워낙 험하니 알 수가 있어야지. 일단 네가 신세질 집에 얘기는 해놓았다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게다가 서울은 사람도 많아 무섭잖니. 어떤 이상한 놈팡이가 있을지 어찌 알아.”
과장되게 한숨을 쉬는 어머니를 보며 세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남자가 따라다닐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남친 없는 경력 = 나이를 갱신 중인 자신이다. 남들이 수학여행이나 학교 축제에서 고백 받아 핑크빛 학창 시절을 보낼 때 그녀는 모태 솔로인 동류들끼리 모여 재미는 있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무한 우정 어린 추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수능이 끝난 뒤로는 당시의 동료들(?)조차 자신의 짝을 찾아 즐거운 연애를 시작하고 있거늘, 졸업식 날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던 세림은 연애 관련으로는 이제 포기 경지에 이르렀다.
“역시 여대를 보낼 걸 그랬나……그럼 걱정도 조금은 덜할 텐데…….”
“엄마……엄마는 내가 평생 솔로로 지냈으면 좋겠어?”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것은 앞으로 다니게 될 대학이 남녀공학이라는 점이다. 이 성격과 외모로 여대에 갔다가는 분명 소개팅을 나간다 해도 실패한 채로 골드미스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뭐, 돈만 많이 벌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을지도 하고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무렵,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어머 얘는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솔로로 지내?”
“왜기는……상대가 있어야 연애를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하지.”
“네가 왜 상대가 없는데?”
어머니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그녀인데도 말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어머니를 잠시 바라보던 세림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물론 여대에 미팅이나 소개팅 거리가 많이 들어온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용없잖아? 난 여대가 아닌 공학에 합격했고, 설령 여대에 다닌다고 해도 내가 그런 곳에 가서 잘 할 리도 없으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엄마는 내가 엄마 딸이니까 고슴도치 어미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걱정하지 않아도 나 따라다닐 만한 이상한 인간은 없으니 괜찮아요. 좀 믿으세요.”
세림의 말에 어머니는 납득이 안 간다는 기색을 띠기는 하였으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림이 너를 따라다닐 정도로 간이 부은 바보는 없겠지. 아무리 서울이 넓고 무서운 곳이라고 해도 말이야.”
“……엄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나를 너무 무시하는 말 아냐?”
딸내미가 걱정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자기 딸이 좋다 쫓아다닐 남자를 바보 취급하는 엄마라니. 눈살을 찌푸리는 세림을 향해 어머니는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나도 참. 걱정할 거 하나도 없는데 괜히 걱정했네! 응. 맞아. 엄마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 얘.”
“…….”
“아, 너 서울 올라가서 집에 도착하면 바로 엄마한테 연락해라? 물론 그쪽에서 너를 마중 나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니. 가서 말썽은 부리지 말고. 너를 4년간 돌봐줄 사람이니까 최대한 말 잘 듣고. 알았지?”
“네, 네. 알았어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에게 대충 대답을 하면서 세림은 나머지 짐을 챙겼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2월의 마지막 주. 3월이 시작되는 다음 주부터는 화려한 대학 생활이 시작된다. 이번에야말로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꽃피는 대학 시절을 보내자고 마음속으로 기합을 넣는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악마에서 마왕으로 업그레이드된 남자가, 무섭도록 치밀한 머리를 회전시켜 덫을 쳐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