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흐음.” 격정적인 키스를 이어 가는 동시에 그의 손짓도 더욱 격렬해졌다. 서로의 타액이 비벼진 입술을 잠시 뗐다, 이어 그녀의 귓불에 키스를 했다. 재경의 입에서 참기 힘든 신음 소리가 삐져나왔다. “……하아.” 그가 그녀의 귓바퀴를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로 나는 소리가 커지는 것이 신경 쓰였던지, 그녀는 어느새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의 애무는 타고난 걸까, 후천적으로 기술을 습득할 걸까 궁금해질 만큼 자연스럽고 또 정확해서 재경은 반응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태윤이 손가락으로 재경의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참지 마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던 여기자 한재경, 첫사랑과 똑같은 얼굴의 남자 정태윤을 인터뷰하며 사랑에 빠지다. 프로페셔널한 인터뷰 전문 여기자 한재경(32세). 재경은 인터뷰의 목적에 따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 말투, 의상을 통해 변신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겉으로는 상처 한 점 없이 살아온 듯 보이는 재경.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현우(정현우, 31세)를 떠올리며 아파하는 일이 잦다. 열아홉, 생의 가장 찬란했던 날 재경의 첫사랑이었던 현우. 그러나 현우는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힘들어하던 재경을 떠났고, 재경을 첫사랑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경은 자신이 객원기자로 참여하는 매거진 피플즈(People’s) 인터뷰에서 첫사랑 현우와 똑같이 생긴 태윤을 만나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데…. 그는 현우와 일란성 쌍둥이인 신인배우 정태윤! 한편 태윤은 처음 본 재경이 낯설지 않다. 재경에게서 기시감과 왠지 모를 애틋함을 느끼는 태윤. 그는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부분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국내 최고의 최면치료 전문의 ‘닥터 신’에게 치료를 받으며 기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태윤. 그러나 수면 아래의 기억은 쉬이 떠오르지 않고 그는 끌어올릴만한 감정이 없자 배우로서 연기력의 한계를 느낀다. 재경, 설레는 마음이 현재의 것인지 아니면 과거로부터 올라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태윤, 동생의 첫사랑이었던 재경에게 향하는 마음이 당혹스럽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인연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애써 선긋기를 하며 관계의 평행선을 유지한다. 그러나 영국에 있던 현우가 귀국하며, 재경 첫사랑의 비밀이 풀린다. 새로운 드라마에 출연하던 태윤은, 자신과 비슷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를 지닌 극중 캐릭터를 연기하며 조금씩 과거를 떠올린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던 밤, 태윤은 다시 한 번 사고를 당하고 잃어버린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 재경은 제 이름도 제대로 못 쓰던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는 자신만을 위한 왕자님이 있을 거라 믿어 왔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같은 동화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세상 둘도 없는 잉꼬부부인 엄마 아빠의 영향이 가장 컸다. 엄마 아빠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고 했다. 그리고 만난 지 얼마 안 돼 재경을 갖고, 함께 하늘나라로 떠나는 그날까지 알콩달콩 사랑하며 사셨다. 사십 대 초반에 돌아가셨으니 검은 머리 파뿌리 되기는커녕, 늦둥이 동생이라도 낳아 줄 수 있는 젊은 나이였다. 엄마는 재경에게 말했었다. [우리 재경이는,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인연을 만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모든 사람한텐 좋은 인연이 나타나게 돼 있어. 근데, 그 인연을 만나려면 자기가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돼. 우리 재경인, 멋진 여자가 될 거니까.] *** 재경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목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잘 꾸며진 외양이나, 마음을 숨기는 표정 앞에서는 잠시 헷갈릴 수 있다. 진실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한 명의 인터뷰이를 섭외하고, 만날 약속을 잡고, 나눈 이야기를 녹음해 녹취를 푸는 과정에서 재경은 목소리는 솔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 희미하면 목소리도 힘이 없다. 허세가 심한 사람은 목소리에도 자기 자랑이 묻어 있다. 물질적인 것을 지나치게 탐하는 사람은 목소리에도 기름기가 껴 있다. 하지만 마음이 맑은 사람은 목소리가 깨끗했다. 진실한 사람의 목소리는 담백했고, 장난기가 있는 사람의 것은 개구졌다. 그래서일까, 재경의 목소리 역시 인터뷰이마다 묘하게 달라지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재경의 신경은 정태윤에게로 걸려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가 좋았다.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을 정도로. *** 얼굴이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라고 소년은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에 짓는 표정과 하는 생각들이 모두 은연중에 나타나는 곳이 얼굴이다. 그건 어른뿐 아니라 십 대 소녀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소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의 뒷모습도 좋았다. 소녀는 어느새 긴 교복 치마를 입었는데 소년의 눈에는, 그 엉덩이 가리개 같은 짧은 치마보다는 저 치마가 훨씬 나아 보였다. 소녀는 이상했다. 소년은 분명 키도 크고 다리도 긴데 왜 자기를 앞서가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먼저 뒤돌아 말을 걸기도 좀 그랬다. 무엇보다 둘은 서로 거의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소녀의 진심은 조금 달랐다. 소녀는 소년에게 즉각적으로 호감이 갔다. 그건 소녀가 좋아하는 H.O.T의 토니나 Y2K의 코지에 대한 호감과는 상이했다. 만화책 속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과도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이때의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