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らすじ
시대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가슴 시린 사랑!
누구보다 행복하고 싶었던 그들의 절실한 사랑이라 더욱 아름답다.
날 용서하지 마라, 절대……. 원망하고 원망해서 죽어서도 그 빚을 다 받아내어라. 너 하나 지키지 못했던 날… 절대 용서하지마라…….
“나에 대한 거라면 욕심쟁이가 되어라. 무엇이든 원해라. 그것이 날 사랑하는 방법이다!”
구 창휘 (창원위). 운명이라 믿었던 여자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그 지독한 운명을 숙명으로 만들어 버렸다.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전 도련님의 여자입니다. 또한 도련님은 제 유일한 낭군이십니다. 영원히…….”
아픕니다. 그리 말씀하시면 제 맘에 날카로운 생채기가 생겨 아물지도 못하고 아파옵니다.
아파서……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윤 소화 (기명, 설화). 운명이라 믿는 남자를 가슴에 새기고 떠났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 사랑을 더 이상 감출 수만은 없었다.
가슴 아픈 사랑. 허나, 그 사랑이 있었기에 세상을 살아 갈 이유가 생겼다.
그들에게 사랑은 정녕 난득지물인가!
다음 생만은 허락해 줄래?
그 억겁의 세월 정말 환생이란 걸 한다면 나에게 다음 생 하나만……, 온전히 다오.
너무 멀어 네 기억에서 내가 사라지기전에, 다음 생에서만은 마음껏 널 사랑하고 싶다.
내 너에게 평생 용서받지 못 한다는 걸 안다.
영원한 사랑을 내 입으로 말해 놓고 널 외면했으니, 네가 날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내 생각밖에 못했으니……, 내 사랑을 믿지 않아도 할 말은 없어.
하지만 널 사랑하는 것에 거짓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 벅찬 감동의 사랑,
숙명이란 이름의 네 색깔의 사랑이 당신의 심장을 두드린다.
“운명이 앞에서 맞는 화살이라면, 숙명은 뒤에서 맞는 화살이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오.”
“하던 건, 마저 해야 하지 않겠니? 네 자진해서 앉지 않았더냐.”
아직도 놀란 가슴을 추스르지 못한 설화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창휘의 손은 반쯤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고 벌어진 입술을 단번에 덮쳐 파고들었다.
설화는 그제야 어깨를 때리며 버둥거리지만, 이미 그의 허벅지에 스스로 앉아 무덤을 판 이후 아닌가. 그리고 그런 그녀를 놓칠 리 없는 경성 최고의 한량으로 소문난 구 창휘였다.
창휘는 꼼짝 못 할 만큼 몸을 밀착시켜 안고, 제 집 안방을 드나들 듯 꽃잎처럼 나긋한 설화의 입속을 거침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헉, 이런 젠장!
창휘는 아래쪽을 찔러오는 날카로운 느낌에 화들짝 놀라 움직임을 멈추더니 서서히 손을 뗐다. 천천히 그녀 입속을 빠져나오던 혀가 아쉬운 듯 장난스럽게 입술을 쪽 빨고는 씩 웃는다. 매섭게 노려보는 설화 눈빛에 움찔하는 척 손을 번쩍 들어 항복의사를 표하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즐거워보였다.
“풋, 가시를 잊고 있었군. 뭣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혹 내 기술이 미흡했소? 흠, 그거라면 도전정신이 불끈 하오. 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이를 어찌 회복한다?”
“농이 나오십니까? 이 물건은 결코 노리개가 아닙니다.”
설화는 보란 듯이 아랫배에 겨눈 칼끝을 더욱 바짝 갖다 댔다.
창휘는 ‘윽’ 신음소리를 내며 과장스럽게 아픈 시늉을 한다. 허나, 그의 장난기는 여전히 자글자글 얼굴을 돌아다니다 눈빛에서 절정을 이루며 그녀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칼을 겨눈 이는 설화요. 손을 들고 항복한 이는 분명 창휘건만, 더 여유로운 사람이 창휘라니. 그의 정체를 안 순간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그의 가벼운 장난질에 혼란스러워졌고, 지금은 지나친 희롱에 자존심이 상해 설화는 분기를 참지 못했다.
고 하얀 얼굴이 더욱 붉어지고, 숨까지 가빠지니, 정작 창휘 눈에 설화는 보름달처럼 탐스럽게 보였다. 때마침 설화가 아랫배에 겨눈 칼끝이 미세한 손 떨림으로 창휘의 민감한 남성을 은근히 찔러댔다. 창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능글맞게 엄살을 떨었다.
“으윽, 설마 고자를 만들 작정이요? 어허, 요놈 아직 제 명도 다 못했는데……. 오호라, 날 평생 책임질 생각이로군. 후후, 그래도 이왕이면 멀쩡하게 데리고 사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내 좀 한다지 않았소. 입 맞추는 기술 외에도 맛을 봐야 할 것이 태산이건만. 어허.”
설화는 급히 칼을 거두고 당혹스럽게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허나, 그의 농에 민망한 것도 잠시, 가슴 쓰리게 씁쓸함이 밀려든다.
설화는 창휘를 돌아보며 꽃잎 같은 입술로 한 마디마디 힘주어 말을 했다.
“들꽃도 함부로 꺾지 않는 법이거늘, 어찌 기생이라 하여 은인에게 이리 난잡하게 구신단 말입니까. 고귀한 분의 행실이 참으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간드러지게 노랠 부르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어찌나 매섭게 나무라는지, 훗. 경국지색은 다 어디가고 말만 남았나 했더니 여기 숨어 있었군! 후후후.
창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그 아찔한 입술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즐겼다. 그리고 설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묘하다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거린다.
“스스로 내 품에 안겨 일어날 줄 모르는 꽃은 들꽃이요? 내 꽃이요? 그 향기에 취해 칼침을 맞는다 해도 꺾고 싶은데, 그건 나의 난잡함이요? 당신의 유혹이요?”
“……!”
설화는 그때서야 자신이 아직 창휘 허벅지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급히 일어나더니 가슴이 드러난 옷매무새부터 바로 잡았다.
[미리보기]
후다닥,
“킥킥, 갸가 복면머스마가 아니라 홍길동인기라. 쪽바리들 똥줄이 빠지게 애믹이면서 퍼뜩 퍼뜩 토끼라. 빙신들, 눈깔이 팽팽 돌아가 환장 하것제? 킥킥킥.”
“이 노무 가스나가 미칬나. 니 뭐라하노? 끌리가가 주 터지고 싶나? 주디 단디해라아.”
“저, 무슨 일이래요? 갑자기 웬 헌병들이래요?”
“아, 그 복면사내라꼬 들어봤지예? 갸가 동방척식주식회사를 털었다 안합니꺼. 그래가 이 난리가 난기라. 우리도 마 새리 가게 문부터 닫아뿟소.”
“아이다! 거다 폭탄을 던졌다카더라. 아까 니도 불난 거 봤다 아이가.”
“우쨌든! 니가 짜다리 뭐 안다고 서방 말에 나서노. 니는 그 주디나 닥치고 끽소리도 내지마라. 아지매도 순사들이 조용해지믄 움직이소. 이럴 때 함부로 댕기다 딱 걸리믄 그대로 한통속으로 몰리가 어찌 될지 모릅니더.”
건너편에서 숨어서 수근 대는 사람들 말에 설화는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복면사내! 복면사내가 나타났다고? 설화는 헌병들 발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다 휙 돌아서더니 갑자기 골목 안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씨! 설화아씨! 위험합니다요. 돌아오셔요!”
“만석아, 잠시 다녀오마. 정말 미안하다.”
설화는 그대로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급히 쫒던 만석은 설화의 모습이 보이지 앉자 안절부절 사방으로 뻗은 골목 중심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헌병들의 움직임이 바로 옆에서 들리듯 가까워지자 설화는 뛰기를 멈추고 숨을 돌렸다. 발소릴 죽이고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복면사내라는 말을 들을 때부터 벌렁거리던 가슴이 더욱 방망이질 하고 있었다. 무얼 하려는 건지 그녀도 모른다. 그저 전신을 휘감는 초조함이 설화를 이끌고 있었다.
“거긴 어때?”
“쥐새끼 그림자도 없습니다.”
“제기랄, 어디로 숨은 거야? 너희는 계속 왼쪽을 맡아라. 나머지를 반으로 나눠 이 골목과 저 골목을 수색한다! 실시!”
헌병 몇몇의 발소리가 설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화는 벽으로 붙어 다급히 숨을 곳을 찾는다.
“거기, 누구야? 사람인가? 뭔가 움직이는 거 같지 않았어?”
“글쎄? 내 눈엔 안 보이는데. 일단 확인해 보자고.”
헉, 설화는 숨도 쉬지 못 할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더듬어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점점 다가오는 불빛 때문에 설화는 파랗게 질려버린다.
휙,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설화 입을 막고 허리를 한 팔로 안아 재빨리 끌고 들어갔다. 순간, 기겁할 정도로 놀란 설화가 제 입을 막은 팔을 붙잡고 버둥거렸다.
“쉿!”
설화 귀에 입술을 붙이고 나직이 속삭이는 남자의 음성, 문득 설화는 그 느낌이 낯설지 않다는 걸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등 뒤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단단한 몸, 거친 심장박동소리, 정수리에 닿은 뜨거운 숨결까지, 모두 낯익었다. 착각일까? 마치 정수리에 그가 입을 맞추는 것만 같았다.
“뭐야? 개 새끼였어? 에잇,”
깨갱 깽깽…, 쨍그랑, 툭……. 문 닫은 상가에서 어슬렁거리던 개를 냅다 차더니, 쌓아놓은 궤짝과 거치적거리는 물건들을 보는 족족 걷어차며 헌병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그들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설화는 사내에게 몸을 맡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도 마치 보호하는 것처럼 품안에 깊이 설화를 감싸 안고 가만히 있었다.
주변이 적막해진 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설화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역시, 저번에 보았던 그 복면사내였다. 온통 까만 복색에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렸지만 왠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의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걸까. 오장육부는 툭 떨어지고, 아까보다 더 숨이 가빠온다. 몸의 이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뜬금없이 그녀의 옅은 갈색동공은 사내의 눈빛과 창휘의 눈빛을 겹쳐 보기까지 했다.
설화는 떨리는 손을 움직여 그 사내의 얼굴로 가져갔다. 제가 생각해도 대담했지만, 필히 사내의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설화는 복면 끝을 잡는다.
그의 목울대가 출렁이는가 싶더니, 사내의 눈빛이 어두워진다. 그는 설화가 복면을 당기려는 순간, 덥석 손목을 잡고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설화는 안타까이 눈을 감는다. 그가 원치 않는다면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 없는 일이다. 설화는 그대로 목례를 하고 돌아서려했다.
그 순간, 그가 설화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도 얼떨결에 잡은 듯 머뭇거렸고, 설화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서로에게 닿은 감촉만이 온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 정녕 누구십니까? 아니지요? 서방님이 아니신 거지요? 헌데, 어찌 이리 불안할까요.
아니라 해주십시오. 절대 서방님이 아니라고 제게 확신을 주셔요.
“저…… 또 도움을 받았습니다. 빚이 늘었군요. 갚을 기회가 있겠지요? 지금은 절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 가야합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절 찾아…….”
휙, 사내는 설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돌려 안아버렸다. 제 품에 깊이 집어넣고 안타까이 쓰다듬었다. 당황하던 그녀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설화는 울컥 올라오는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죽여 흐느꼈다. 그는 더욱 애타게 설화의 자그마한 등을 쓸어내린다.
“거기, 설화니? 설화야!”
갑자기 우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만석이 다급히 다가와 초롱을 들이댔다.
설화가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놀라 돌아보고, 복면사내는 설화를 안고 있는 채였다. 우진은 그대로 달려들어 복면사내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가격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미처 피할 틈이 없었던 사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 우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내 순사의 눈을 교란시키며 당신을 도왔건만, 우리설화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안 돼요! 오라버니! 이분을, 이분을 이리 대하시면 안돼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
설화는 자신을 붙잡는 만석을 뿌리치고, 다급히 복면사내에게 달려가 우진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우진은 머릴 한 대 얻어맞은 거처럼 멍해진다.
“괘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오라비가 사정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서 설화, 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우진은 당황스러웠다.
“오해십니다. 오라버니. 이분은 절 도와주신 거여요. 오라버니가 오해를 하신 겁니다.”
복면사내는 설화를 물리고, 일어나 조소 어린 눈빛으로 맞은 자리를 쓰윽 문질렀다.
“우리 설화……? 후후. 이것으로 오늘밤 내가 진 빚은 청산한 걸로 하지. 댁한테 빚을 지긴 싫군.”
돌아서기 전 잠시 설화에게 머문 그의 눈길은 쓰디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화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합니다. 부 부디 조심해서…….”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연히 골목 안으로 사라져 갔다. 설화는 그가 사라진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우진은 아직도 가쁜 숨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 사내와 설화가 함께 풍기는 그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설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우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흠칫 놀라 복면사내가 사라진 골목을 뚫어져라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