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명 제이. 무자비한 복수를 위해 최고의 킬러가 된 그는 어느 날 임무 수행 도중 기분 나쁠 정도로 죽은 어머니를 너무도 닮은 여자를 보게 된다. 그래서 차마 죽이지 못했던 여자, 서우림. 돈이라는 굴레에 묶여 매춘 일까지 하려 했던 그녀는 그 첫 날, 영문도 모른 채 킬러의 집에 감금 된다.
그렇게 둘의 위험한 동거가 우연히 시작되고 긴장감 속에 미묘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본문 중에서-
우림은 무섭고 복잡한 생각에 한숨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이라는 것은 창문 틈 사이로 아른거리는 아스팔트의 아지랑이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밟고 다니는 땅을 눈높이에서 보니 완전히 팽개쳐진 것 같아 더 서글펐다. 전날 밤, 단도에 살짝 스쳐 난 상처는 아직도 벌어져 피가 고여 있었다. 그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 그것도 사람을 죽인 남자와 한집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나 정말 계속 여기 사는 건가? 아니, 어쩌면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겠지.’
우림은 감옥 철창 같은 창문 앞에 서서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곱씹었다. 처음 손님을 받고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는 미미한 떨림이 심장을 가득 메웠다.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목숨을 위협받을 때는 숨이 멎을 뻔했다. 그리고 갇혀 있는 지금, 뜀박질 하던 심장이 잠잠해진 틈에 우림은 동생 재림이 생각났다. 모의고사 때문에 매일 독서실에서 살던 아이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러고 보니 우림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이러니한 여유를 즐긴 것도 잠시, 제이의 방문이 열렸다. 우림의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 철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이는 우림을 본체만체하며 화장실로 갔다. 우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간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제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 깜짝이야.”
중얼거리는 우림의 작은 목소리조차 거슬렸던지 다시 문을 열고 나오는 제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진짜 거슬리는군.”
우림은 제이의 묵직한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바짝 긴장한 얼굴엔 아직도 화장기가 남아 있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림에게 내던지듯 물었다.
“까만 정장 어디 뒀나.”
아무런 위협이 되지도 않는 말이었지만 우림은 눈물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을 살려준 은혜를 갚는답시고 청소라도 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화를 돋우게 된 것이었다. 그 정신없는 통에 무슨 옷을 어디 뒀다거나 하는 자잘한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옷이 거의 죄다 검정색이어서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우림은 벌벌 떨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찾아볼게요.”
우림이 쭈뼛쭈뼛하며 제이의 방에 들어가려 하자 제이가 우림의 팔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잡아 세웠다. 그 차가운 손길에 우림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내가 이 방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말을 끝내고 제이는 우림의 손목을 버리듯 놓아주었다. 옷장은 제이의 방에 있었다. 작은 방에는 서랍장뿐인데, 정장을 서랍장에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그 방 안에 있다. 우림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꾸역꾸역 참고 말했다.
“아마 저 옷장에 걸어 뒀을 거예요.”
“내가 안 찾아 봤을 것 같나?”
당황한 우림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이는 우림을 노려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우림은 방에서 무기를 가져와 자기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미친 듯이 두려웠다.
-미리 보기-
토요일 밤은 늘 북적하다. 모든 가게 간판의 네온사인 불빛들은 붉은빛으로 유혹했다. 사람들은 그 유혹에 못 이겨 집에 있지 않으려 했다. 거리나 가게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 넘쳐나는 사람들 안은 모습을 숨기기 쉽다. 어두운 세계에 몸을 담고 있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갑부들도 이런 토요일 밤의 특권을 누리기에 예외는 없었다. 단지 그 특권을 누리는 장소가 일반인들과는 다를 뿐. 겉으로 보기만 해도 돈 없는 사람들은 큰맘 먹고 가야 할 곳이거나, 발도 들일 수 없는 좋게 말하자면 고급스러운 곳,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번지르르한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남자가 혼자 그 앞에 서 있었다. 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건물의 황금빛 간판으로 향했다. 남자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거의 다 타들어갈 때 쯤 남자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I’m arrived. I’ll get rid of him.”
-Thank you. Jay. good luck.
의도적인 짧은 통화가 끝나고 제이는 안으로 들어가 프런트에서 직원에게 봉투와 한 남자의 사진을 건넸다. 직원은 포스트잇에 1002라는 글자를 쓰고 돈이 든 봉투를 조심스레 숨겼다. 제이는 사진과 포스트잇을 챙기고 10층으로 갔다. 부드러운 카펫이 복도마다 깔려 있었다. 덕분에 발자국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고 CCTV도 미리 손을 써놓은 상태라 제이는 1002호가 보이는 객실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갈 수 있었다. 제이는 직원에게 받은 카드키를 사용해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목표 타깃은 다른 사업 이외에 마약 사업도 하고 있던 조직의 보스였다. 마약 사업으로 외국인에게 사기라도 쳤는지 원한을 산 것이었다. 타깃은 거의 벗다시피 속옷만 입고 있는 무표정한 여자를 그마저도 벗기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제이는 콜트를 꺼내 타깃의 머리에 겨누었다.
타깃의 곁에 있던 여자는 깜짝 놀라 이불로 몸을 가렸고 고맙게도 소리는 지르지 않고 벌벌 떨기만 했다.
“넌 뭐야!”
“마지막으로 할 말은…….”
“누가 보냈어. 이 새끼야!”
“끝.”
제이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깃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가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한지 1분도 되지 않아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제이는 누워서 벌벌 떨고 있는 여자에게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사, 살려 주세요!”
“마지막으로 할 말은…….”
“말 안 할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저, 살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짓 하려 한 거예요. 전 살아야 해요. 오늘 처음으로…….”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제이의 차가운 표정에 여자는 가망이 없다 생각하고 포기한 심정으로 울기만 했다. 여자의 이름은 서우림이었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덜컥 화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다. 맨 처음, 신문 한 자락에 적힌 도우미 아가씨 구인 광고는 우림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런 일이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돈을 벌 수 있음에 심지어 감사했다. 잠깐의 수치스러움을 견디면 수백만 원, 수천만 원을 벌 수 있었기에 우림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했고, 처음으로 손님을 접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첫날 돈은커녕 목숨조차 위태로웠다. 우림은 거의 다 벗은 채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의 앞에서 비참하게 울었다. 제이는 눈을 부라리며 우림을 노려보다 총을 거두었다.
“옷 입어.”
“네?”
“옷 입고 따라 나와.”
우림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제이는 돌아서 어딘가에 문자를 보냈다. 우림은 저승사자 같던 소름 끼치는 제이의 얼굴이 사라지자 그제야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이는 우림이 옷을 다 입고 나오자 손목을 낚아채 걸어 나갔다. 호텔을 조금 벗어난 골목에 제이의 차가 있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
“저, 갈 데는 있어요. 저기 사거리 앞에 세워 주시면…….”
“한 번만 더 입 열면 죽여 버린다.”
우림은 겁에 질려 입을 꾹 다물었다. 제이는 여자를 차에 쑤셔 넣듯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제이의 집은 작은 반지하였는데 집안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저, 저기.”
“내 신변이 밝혀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입 다물게요.”
“그들은 니가 죽을 때까지 고문하고 입을 열 게 할 거다. 니가 죽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알아요…….”
“여기서 나갈 생각도 하지 마라. 살고 싶으면.”
우림은 겁에 질린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휴대폰은 제이의 손에 박살이 났고 현관은 밖에서 잠가 놓았다. 우림은 절대 나갈 수 없었다.
“저, 부탁인데 전화 한 통만 쓰면 안 될까요? 동생이 있는데 걱정할 거예요.”
제이는 우림의 말을 무시하고 현관을 잠그고 나갔다. 우림은 또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저앉았다. 제이는 그 흐느낌이 듣기 싫어 그곳을 벗어나듯 무작정 뛰쳐나갔다.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사이로 제이가 보였다. 그는 한 인기 많은 바(bar)에 들어갔다. 제이가 들어서자 바텐더 한 명이 제이를 반겼다. 그는 제이의 절친 준수였다.
“뭐? 니 집에 누가 있다고?”
“시끄러워.”
준수는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상체까지 조금 숙여서 말했다.
“아, 아니. 정말이야? 진짜 니 집에…… 읍!”
제이는 준수의 입을 막았다.
“너만 알고 있어라.”
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술잔으로 옮겼다.
“근데 니가 웬일이냐. 니 인생에 목격자는 단 한 명도 없다며.”
“왠지 그 여자…… 아무튼 조만간 죽일 거야.”
제이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겨우 억지스럽게 맺었다. 준수는 제이의 멍한 얼굴을 보고 눈치를 챈 듯 농담을 하며 넘겼다.
“조만간? 니가 그런 배려도 할 줄 아는 놈이었냐.”
제이는 술잔만 들이켜고 칵테일을 더 시켰다. 그의 차가운 얼굴 안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가려져 있다는 것은 준수만 알고 있었다. 준수는 제이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금동화. 니가 선택한 일이니까 말리진 않을게. 근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인 거 알고 선택했어. 그리고 죽어도 상관없어.”
“죽지 말고 조심하라고 인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금동화라는 본명이 노출되는 것조차 위험해진 킬러라는 직업은 그에게 제이라는 가명을 주었다. 제이는 킬러라는 길을 택하고 일을 수행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제 그는 킬러들 사이에서도 위험한 인물이 된 최고의 킬러가 되었다.
“니가 죽으면 어머니 제사는 누가 지내냐.”
어머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안쪽 주머니에 있는 총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더러운 돈을 많이 만지다 보니 더러운 원한도 많이 샀다. 그래서 제이는 늘 몸에 총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말에 아직은 가슴이 시린 걸 보니 잔인함은 그의 심장까지는 점령하지 못한 것 같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팔에 알 수 없는 상처를 가득 입고 우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다음으로는 그런 얼굴로 제이 자신에게는 웃어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제이는 벌써 칵테일 한 잔을 다 비웠다. 어머니 생각만 하면 한 잔이든 두 잔이든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셔댔다.
“이제 그만 마셔. 인마.”
준수는 늘 어머니라는 환영에 사로잡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제이가 늘 안타까웠다. 가끔은 그의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제이는 자신의 집에 있는 우림이 생각났다. 술을 마신 탓에 여자가 떠오른 것인지 제이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어디가! 계산 안 하냐!”
지금 제이는 준수의 외침보다 자신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를 제거할 때마다 제이는 수도 없이 온 힘을 다해 전력질주를 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죽을 듯이 달려서인지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흘러내렸다. 제이는 숨을 헐떡이며 문을 부수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폭탄을 맞은 듯 지저분했던 집 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제이의 심장은 더욱 요동쳤다. 그때, 방에서 우림이 조심스레 나왔다. 우림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제이는 우림을 밀치고 그 방에 들어갔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 이건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몰라서…….”
방 안에는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무기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우림은 뭘 잘못 건드렸는지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제이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우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다.
“미, 미안해요.”
제이는 총을 꺼내 우림의 머리에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