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쌍과붓집 외동딸이다. 유명한 디자이너이신 외할머니와 독특한 디자이너이신 엄마가 경영하시는 고구려 웨딩드레스 샵의 유일한 후계자이다. 우리 가게 이름이 ‘고구려’가 된 이력은 간단하다. 외할머니의 성씨 ‘고(高)’와 엄마의 성씨 ‘구(具)’와 나의 성씨 ‘여(呂)’를 합친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고구려 웨딩드레스’란 한글 간판 아래 작게 쓰인 ‘高具呂’를 완전 개무시하고 애국심에 불타서 ‘高句麗’로 읽어버린다. 그리고 한옥에 자리잡은 아주 고풍스런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가게라고 일찌감치 결론지어 버린다.
올해 고구려 웨딩드레스의 가장 큰 사업안은 매출신장이나 해외사업 확대나 신입사원 채용이 아닌 아주 사소한 것이다. 고원장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구마담의 하나뿐인 라이벌인 나 여미실(呂美實)의 결혼이다. 지금이 벌써 꽃이 지는 사월인데 올해가 가기 전에 시집을 가야 할머니의 후계자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내 나이 겨우 스물하나. 재수해서 이제 겨우 대학 2학년이다.
“할머니, 저 이제 스물하나예요. 대학생인데 어떻게 시집부터 가요?”
놀라서 울먹이는 내게 할머니께서 일갈하셨다.
“나는 열아홉에 시집왔어. 스물하나가 뭐 어려?”
여대를 나오신 엄마는 한 마디 더 하신다.
“남녀공학이니 결혼해도 잘리진 않겠다.”
이럴 땐 모처럼 할머니와 엄마가 의기투합해서 나를 협공한다. 할머니의 건강이 하루하루 나빠지셔서 항의할 수도 없다. 엄마도 내 편이 절대 아니다.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시간조차도 내 편이 아니다. 고립무원이다.
그런 내게도 일편단심 나만 바라보는 배꼽친구 백민규가 있다. 국수집 삼대독자인 민규는 곧 군대를 가야하고 군대 가기 전에 나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나도 유치원과 동창생인 민규를 부담없이 옆에 두고 좋아한다. 그러나 결혼하고 싶을 만큼은 아니다. 민규는 과거엔 찌질한 울보였고 지금은 집요한 질투쟁이다.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하는 민규에게 삐친 내 앞에 아빠를 연상시키는 사각턱의 멋지고 여유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민규야, 나 좀 잡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