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 노천명의 서정적인 수필!!
백설이 분분하여 봄의 기분이란 용이히 맛볼 수가 없다. 그러나 모질게 몰아치는 그 바람에는 어지럽게 떨어지는 그 눈송이에도 여인의 바쁜 숨결 같은 것을 내 볼 위에 흐뭇이 느끼게 됨은 봄이 오는 자취가 아닐까.
나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멍하니 유리창문을 바라본다. 오늘 저 유리문은 햇빛을 고이 받아 환히 틔었다. 언제나 저 문엔 누가 그리는 사람도 없는데 갖가지로 그림이 아로새겨진다.
오늘은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고 파란 하늘을 한 가슴 가득히 안고 있다. 우리 고향 뒷뜰에 풀쿠리 속에 숨어 있는 박우물같이 맑고 그렇게 하늘을 안고 있다. 앞집 뜰에 서 있는 포플러 나무가 우리 뜰의 것같이 가깝게 보이고 앞집 지붕에 녹다 남은 눈떨기는 가을의 목화송이 같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여름밤> 앞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낙비처럼 울어 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산덩굴,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째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나, 그것은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에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안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도 좋은 넓은 마당에는 이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이 한창 벌어지는 것이다. 멍석 자리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정다울 수 있고, 큰애기에게 다림질을 붙잡히며,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는 별처럼 머언 애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함지박에는 갓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오란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법이겠다.
쑥대불의 알싸한 내를 싫찮게 맡으며 불 부채로 종아리에 덤비는 모기를 날리면서 강냉이를 뜯어먹고 누웠으면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