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여자. 송이수.
그녀의 마음 안으로 남자라는 이름으로 다가서려는 세 남자.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이 으악 소리를 내던 어느 날,
그녀 혼자 훌쩍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아찔한 절벽 위에 선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주며 심장을
쓸어내리는 남자. 백현민.
그가 내민 손을 그녀는 잡을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그녀는 절벽 위에 서서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마주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절벽 쪽으로 한 발을 떼는 순간 갑자기 그녀를 붙잡는 강한 힘에 이끌려 그녀의 몸이 휙 하고 돌려졌다.
“아, 당신은…….”
억세게 비가 퍼붓던 날 난간을 꼭 붙잡고 서 있던 그때처럼 절벽 쪽으로 한 발자국 떼는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줄 알았다. 바다 쪽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발을 떼는 그녀를 붙잡은 찰나, 그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반면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동그랗게 커진 눈을 한 그녀가 그를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그러세요?……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녀의 차가운 눈이 냉랭한 빛을 뿜으며 그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를 잡았다는 안도감에 그만 그는 그녀를 안아 버렸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그는 더 힘을 줘 세게 안고 있었다.
“이수 씨,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당신이 알면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줄래요? 내가……내가, 이 심장이 모두 닳아서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다시는, 다시는 위험한 곳에 서 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녀가 잘못 들은 것일까. 그의 목소리 저변에 그녀를 염려하는 울먹거림이 깔려 있는 듯했다. ‘왜? 무엇 때문에?’
마주 안은 가슴 사이로 그의 심장이 세게 뛰고 있었다. 많이 놀라서 그렇겠지? 둥둥둥둥. 자신의 심장에서 북소리 같은 두근거림이 점차 크게 울려댔다. 근데 내 가슴은 왜 덩달아 뛰어대는 거지? 실장님이 안을 때도 아무렇지 않던 심장의 울림이 왜 이 남자의 심장에 반응하는 것일까? 남자? 그럴 리가 없는데……. 이번에도 우연일까?
조금 진정이 되었다고 판단을 내린 그는 그녀를 안은 팔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겸연쩍어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갑자기 잡아 당겨서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냥 내 손이 당신을 잡아 버렸네요. 하하. 이젠 좀 괜찮아 보이는군요. 우리 저기에 좀 앉을까요?”
그녀도 그를 따라 벤치에 가서 앉았다. 벤치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아직도 그녀를 걱정하는 빛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왜 그는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일까?’
그녀는 의문이 든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봐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험하니 난간에서 떨어져 얼른 안쪽으로 건너와요.”
그가 목울대를 울리며 큰소리로 말을 하는데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순간 알 수 없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평소 자신의 신조를 어긴 채 남 일에 나서는 자신의 모양새도 마음에 안 들었고, 기껏 도우려 나선 걸음에 낯선 여자는 자신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에 마음을 상했는지도.
그때 번쩍하는 번개와 천둥소리가 두 사람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희미하게 흠칫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급히 그녀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어투 속에는 미약한 화가 담겨 있었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당신 미쳤어?”
그녀의 귀에 대고 소리치자 그제야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둠에 잠겨 깊고 공허해 보였다.
“당신, 뭐야? 상관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
비바람에 찬 기운이 잔뜩 묻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강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화가 나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누구라도 불씨만 갖다 대면 불이 붙으려 하는 그의 심장에 그녀가 점화 스위치를 누르려 하고 있었다.
그는 우산을 던져 버리고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꽉 다문 잇새로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지. 당신이 저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말리지는 않겠지만, 지금 내가 당신을 발견한 이상 더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었으니 상관해야겠어. 더 이상 고집 부리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팔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으며 저항이 멎을 때까지 비를 맞고 있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그녀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낯선 남자의 품 안에 그대로 자신을 놓아 버렸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와 상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 안긴 여자가 떨기 시작했다. 차츰 떨림의 강도가 높아갔다. 그녀를 어서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에 그가 안아 들려고 하는 찰나 그만 그녀가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서 아주 희미하게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규원아.”
그는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묘한 궁금증이 일었다. 비에 젖어 정신을 잃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하나. 아이러니하게 조화롭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는 얼굴을 강하게 때리는 비바람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억센 비바람에 이미 속옷까지 젖어 버린 건 한참 전이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자각에 그는 그녀를 안아 차에 태웠다.
‘당신의 남자 이름인가? 헤어진 모양이군.’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그는 얼른 운전석으로 돌아와 타고는 정신을 잃은 채 잠을 자듯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검은 눈동자, 알맞은 크기의 코, 시퍼렇다 못해 죽어 보이는 검은 입술과 비에 젖어 얼굴에 찰싹 붙어 있는 긴 머리카락이 한 번쯤은 그녀를 뒤돌아보게끔 할 것 같은 묘한 매력을 가진 인상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떤 색깔일까?’
그는 모양 좋은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내려 애쓰며 눈을 돌렸다. 지금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의 입술로 시선이 자꾸만 가는 것을 거둘 수가 없었다.
거의 레스토랑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그가 멈추어 서더니 그녀의 몸을 돌려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두 사람의 심장이 팔딱팔딱 조화를 이루어 뛰어댔다. 그의 혀가 더 깊숙이 파고들어 정신없이 헤집자 이수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그의 뺨을 때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그는 예상했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두 번째군. 내가 맞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거야. 당신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당신 입술은 정말이지 치명적인 유혹이야. 거부할 수 없는.”
회사 앞에서 도도한 채로 내빼던 그녀를 잡아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원하고 바라던 것이었다. 그녀가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의 음흉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당연한 결과를 예측했다. 비록 뺨을 맞긴 했지만 그녀의 입술을 맛본 탓에 그의 기분은 만족스러웠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의 그녀의 입술은 정말 달콤했다. 그는 아쉬웠다. 한창 맛을 음미하던 때에 그녀에 의해 중단된 키스에 몸이 애 닳았다. 그러자 자연히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조금 전의 키스로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그는 그만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짜릿하고 행복했다.
짧지만 강하고 깊은 키스였다. 한 번 더 짧은 입맞춤을 한 그는 다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런 그의 기습 키스에 그녀는 정신이 멍할 정도로 얼떨떨했다. 여전히 그녀의 입술에 남은 키스의 여운이 그녀의 볼을 엷게 물들였다.
두 사람은 지배인의 안내를 따라 창가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엷게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본 그는 흐뭇한 마음에 싱긋 미소를 날렸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기분 좋게 식사합시다.”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음식들이 차례로 나오고, 그와 그녀는 가볍게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운전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걱정 마. 대리 부르면 되니까. 그런 얘기로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은데, 당신 은근히 무드 없는 거 알아?”
“나 원래 그런 여자에요. 몰랐어요? 재미도 없고, 애교도 없어요.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아요. 고분고분한 성격도 안 되는데, 이런 나를 찾아오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게,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 그 이유가 뭔지 알 때까지 당신이라는 여자를 알고 싶어졌어. 그러려면 당신을 자주 만나야 하겠지, 그래도 되겠어? 허락해 줄래?”
“아니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나란 여자를 떨쳐 버려요. 난 당신이란 남자에게 관심도 없고, 그 이유도 알고 싶지 않으니까요.”
“왜 그 사람 때문인가? 정신을 잃으면서도 찾던 그 사람, 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말이야. 당신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사람 때문에 남자란 남자는 모두 밀어내는 건가?”
규원을 거론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 버린 것 같은 그의 발언에 그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말을 잃어버린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버리는 것을 본 그는 아차 싶었다. 그녀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 그는 미안한 마음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아픔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차올라 떨어져 내리는 맑은 물기에 그는 자신을 한 대 패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만 가는 게 좋겠어요. 먼저 나가 있을게요.”
황급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린 그녀의 뒷모습이 여려 보였다. 아마 밖으로 나간 그녀가 울고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보호받고 있다는 듯, 사랑받고 있다는 듯. 자신을 단단하게 안은 팔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팔을 쓰다듬어 보았다. 손안에 느껴지는 남자의 근육이 강인함 그 자체였다. 눈앞에 매끈한 가슴도 보였다.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자잘한 근육이 자리 잡은 편편한 배는 환상적이었다. 그녀가 손으로 치골을 쓰다듬는 순간 잠을 자는 줄 알았던 그가 손을 잡았다. 이 남자의 습관은 옷을 입지 않고 잠을 잔다는 데 있다.
“어디까지 내려갈 거야?”
“그건 나도 모르죠. 당신 여기에 왜 있는 거예요? 일어나 그만 가요. 나 출근해야 해요.”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한 침대에 있는 거야. 보고 싶어서 왔어. 당신은 나 안 보고 싶었나?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토요일이네. 출근은 무슨? 모닝 키스 안 해줄 거야?”
“나 당신하고 말장난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 가는 게 좋겠어요.”
슬립 차림의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시 안아 침대에 뉘었다. 그는 팔꿈치를 침대 위로 놓아 상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그녀가 도망을 못 가게 허리를 안았다.
“왜 이러실까? 까칠하게. 나 밀어내지 마. 누가 뭐라고 해도 넌 아직 내 여자야. 난 너 포기 안 해. 키스 좋아하는 이수 씨, 우리 키스 할까요?”
그가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 위를 그가 혀로 쓸기 시작하자, 그녀의 목 안에서 거부의 음이 흘러나왔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의 마음을 돌려놔야 했다.
“앙탈부리지 말고 내 혀를 받아들여. 강제로 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해.”
그녀가 몸을 바로한 채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거부의 몸짓이라는 것을. 여기서 더 이상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더 멀리 도망갈 거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가만히 그녀를 안았다.
“이수야, 정말 미안해. 네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 다시 네가 나를 밀어내고 있지만, 난 기다릴 거야. 다시 내게로 올 그날을. 너 몸 상하지 않게 술 마시지 마. 다음에 우리의 아이들이 생길 귀한 몸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힘들지 않으려면 조금 살집이 있어야 좋은 것 같더라. 그러니까 끼니 건너뛰지 말고 꼭 챙겨 먹어. 알았지? 나, 간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지 침대가 출렁거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내쳐 들리는 것을 보니 옷을 챙겨 입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침대 근처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눈감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필시 슬픈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겠지. 심장을 찔러오는 통증에 그녀는 감은 눈에 더 힘을 주었다.
잠깐의 정적이 머문 뒤, 뒤돌아서는 발걸음에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휑한 정적이 집 안을 맴돌았다. 그녀 곁에서 그가 떠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그녀의 집이 있는 층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거리가 먼데도 무한정 슬퍼 보였다. 그는 한참을 서서 위쪽을 쳐다본 뒤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택시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창가에서 침울한 마음으로 미적거리며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그의 온기가 가신 침대에 엎드려 심장을 부여잡고 꺽꺽거리며 울음을 토해냈다.